나는 2005년부터 경기도 광주 나눔의 집에 계시는 일본군 위안부로 고통 받은 할머니들과 꾸준히 인연을 이어왔다. 당시 할머니들을 주제로 한 시낭송과 직접 증언을 듣는 문학행사는 여러분들이 최초라는 나눔의 집 사무국장님의 말이 기억난다. 그 때 나눔의집 문학한마당 진행을 맡았던 소복수 시인을 비롯 여성 시인, 작가들은 할머니들의 생생한 증언을 듣는 시간 내내 눈물을 흘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 참석자 대부분은 할머니들의 증언을 들으며 일제 식민지 역사에 대한 울분과 일본에 대한 분노의 감정이 치솟기도 하였다.
2008년 세상을 떠나신 지돌이할머니는 참 말씀도 없고, 늘 차분한 분이셨다. 이 가을처럼 날씨가 차가운 계절이 다가오면 늘 털모자나 검정 벙거지를 눌러쓰고, 따뜻한 햇볕 아래 혼자 있기를 좋아 하셨다. 나눔의 집을 방문할 때마다 할머니에게 인사를 드리면 가느다란 미소를 지으며 여린 팔을 흔드신다. 간혹 아픈 과거사가 기억나는 날이면 중얼중얼 타령조로 혼잣말을 즐기신다. 젊은 날의 서방님도 생각나고, 중국에서 참 힘겹게 키워낸 아들, 딸들의 모습도 살아나는가 보다. 나는 가끔 할머니의 손등을 어루만지며 침묵의 시간을 나누기도 했다. 나는 할머니 손등의 체온으로만 이야기를 듣고, 가는 눈빛으로만 순정한 십칠 세 처녀적 과거사를 아프게 느꼈다. 그러다 얼마 전 할머니에 대한 시를 썼다.
금년 7월 세상을 떠나신 김군자 할머니께서는 어느 핸가 상당히 상심한 듯 속내를 털어놓으셨다. 그 곳 할머니들은 일상처럼 점심을 드시고 나면 소화도 시킬 겸 나눔의 집 인근 마을을 산책하셨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동네 어귀를 지나는데 그 동네에 사는 같은 또래 할머니들이 김군자 할머니 일행을 보고 왜정 때 일본군인에게 많이 당해서 정신이 이상해졌다느니, 일본 남자들에게 몸판 여자라는 등등 수군거리며 손가락질 하는 것을 보고 여간 속상한 게 아니었다고 들려주시었다. 그 일이 있은 뒤로 동네산책은 하지 않는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에 강제로 납치되다시피 이국땅으로 끌려가 온갖 고초를 겪으며 처절하게 살아온 할머니들에게 같은 여성으로서, 또는 동시대인으로서 위로의 손길은 건네지 못한다 해도 아픈 상처에 덫을 내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나눔의 집을 방문할 때마다 역사의 어머니이기도 한 할머니들께 아들, 딸의 심정으로 시 한 편씩을 낭송했지만, 그러나 그 분들의 가슴에 얼마만큼의 위로와 우리의 뜻이 전해졌을지, 그저 깊은 회한과 한없는 죄책감을 안고 돌아오곤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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