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고성 소가야는 '작은 가야'가 아니라 '철의 가야'였습니다."
이영식 김해 인제대 명예교수는 최근 이같이 주장했다.
이 교수는 "고성 소가야는 '쇠가야'가 잘못 전해진 것으로 생각된다"며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의 경덕왕은 고자군(古自郡)을 고성군(固城郡)으로 바꾸었고, <신증동국여지승람>은 한 때의 지명이 철성(鐵城)이었음을 전하고 있다. 고성(固城)과 철성(鐵城)은 '쇠처럼 단단한 성'이다. 지금도 '소고기'와 '쇠고기'는 서로 통한다"고 밝혔다.
이 교수는 "전·후기의 가야사에서 보여주는 고자국의 위세와 고성읍 중심에서 발굴되었던 동외동패총유적에서도 증명된다"면서 "1974년 부산의 동아대박물관은 패총유적의 아랫단에서 넓이 3×1.5m 두께 2~5㎜의 야철지를 발견했다. 또한 1995년 국립진주박물관은 패총유적의 윗단 중앙부의 제사유적에서 두 마리의 새가 마주보고 있는 청동장식을 발굴했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쇠가야 고자국의 성장은 3세기 전반에 사천(사물국)·함안(아야국)·칠원(칠포국)·마산(골포국) 등과 함께 김해 가락국의 해상교역권 독점에 도전하고 있는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밝혔다.
이 교수는 "이전까지 고성지역에 분포하던 고인돌의 청동기문화를 통합하고 철기문화 단계로서 가야국의 출발을 보여주는 것이 동외동유적이다"며 "그 나라의 이름은 고자국(古自國)이었다"고 말했다.
"곶은 장산곶이나 장기곶처럼 바다로 튀어 나간 고성반도의 형상과 잘 어울리는 이름이다"고 하는 이 교수는 "바닷가에 인접해 곳곳에 만곡이 심한 고성의 자연 지리적 특징에서 비롯된 국명으로 짐작된다. 통영까지 튀어나간 고성반도의 지형은 해상왕국의 면모를 가지고 있던 고자국의 이정표가 되기에 충분하다"고 밝혔다.
이 교수는 "서울 한강 가의 풍납토성에서 가야토기 5점이 출토됐다"며 "김해·고령·창녕·함안 등의 가야토기에 있었던 뚜렷한 지역적 컬러처럼 고성 가야국만의 특징이 있다. 즉 고성·사천식 또는 소가야식으로 불리는 토기이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서을 풍납토성에서 출토되었다는 것은 고성의 가야왕권과 서울의 백제왕권 사이에 일정한 교류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며 "가야토기와 출토되었던 유구에 대한 연대추정을 통해 5세기경의 역사적 사실로 생각된다"고 밝혔다.
이 교수는 "5세기 대 고성의 가야토기가 한성시대의 백제 왕성에서 출토되는 것을 가지고 백제와 왜의 초기교섭에 남해안의 고자국이 깊이 관여하고 있었던 증거로 해석하는 데는 별 무리가 없을 것이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5세기에서 6세기 전반에 걸치는 고성스타일의 토기는 북으로 함안 군북(오곡리고분군)·의령(천곡리고분군)·합천(저포리고분군·삼가고분군)으로 뻗치고, 북서쪽으로는 진주(가좌동고분군·우수리고분군·귀곡동고분군)로 진출해 경호강을 따라 산청(중촌리고분군·명동고분군·묵곡리고분군·옥산리고분군)·함양(손곡리고분군)을 거쳐, 남원(월산리고분군·건지리고분군)·장수(삼고리고분군)의 전북지역까지 북상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 교수는 "5세기후반이 되면 대가야(고령)의 팽창으로 위축되기도 하지만, 6세기 전반까지도 동쪽으로 마산을 건너다보는 동해면(내산리고분군), 서쪽으로 영오면(연당리고분군 · 영대리고분군) · 사천(예수리고분군) · 하동(고이리고분군)까지에도 그 세력을 유지하고 있다"면서 "진주에서는 남강을 경계로 북쪽의 수정봉고분군 · 옥봉고분군이 대가야 일색으로 바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강(江) 남쪽의 가좌동고분군은 여전히 고성적 색채를 유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바로 이 시기에 고자국 왕권의 실재와 위상을 보여주는 것이 고성읍내에 위치한 송학동고분군이다"며 "1999년부터 2002년까지 진행되었던 발굴조사는 이 고분군을 둘러싼 그동안의 논쟁과 국제적이었던 고자국 최고지배자의 모습을 보여주게 되었다"고 밝혔다.
이영식 교수는 "고성 송학동고분군 천정에 붉은 칠을 한 돌방무덤과 거기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강한 왜(倭) 계통의 색채를 보여주고 있다"고 하면서 "발굴단은 출토된 유리구슬과 목걸이들로부터 여성의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다. 고자국왕에게 시집왔던 왜의 여인이 아니었을 까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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