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1월과 2월은 노동조합이 한 해의 방향을 확정하는 시기다. 한국의 많은 노조가 대의원대회를 열고 연간 사업계획과 교섭 의제를 확정한다. 어디에, 얼마나, 인력과 재정을 투입할 것인지, 어떤 의제를 교섭과 노조 활동의 전면에 세울 것인지를 결정한다. 이는 노조가 어떤 위험을 핵심 문제로 인식하고, 사회적 쟁점으로 만들 것인지 선택하는 정치적 과정이다.
임계점에 선 기후, 의제 설정의 우선순위
우리를 둘러싼 환경은 근본적으로 바뀌고 있다. 세계기상기구(WMO)는 2024년 전 지구 평균기온이 산업화 이전 대비 약 1.55℃ 상승했다고 발표했다. 단일 연도 기준으로는 이미 1.5℃를 넘어선 것이다. 파리협정의 목표가 장기 평균임을 고려하더라도 한계선이 현실적으로 위협받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폭염과 집중호우와 같은 기후재난은 산업현장을 마비시키며, 탄소감축 규제와 산업 전환은 AI·디지털 전환과 맞물려 생산방식 자체를 바꾸고 있다.
그럼에도 기후위기 대응은 노조 사업계획 수립 과정에서 하나의 '고려사항'으로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기후위기는 더 이상 환경 담론의 문제가 아니다. 임금, 노동시간, 안전보건, 고용안정과 직결된 구조적 변수이자 더 본질적으로는 무엇을, 얼마나, 어떻게 생산할 것인가에 관한 문제다. 그렇다면 질문은 분명하다. 기후위기 대응은 왜, 아직도, 노조의 '별도 사업'인가?
기후를 노조 전략의 중심으로
기후를 노조 전략의 중심 의제로 전환하려는 흐름에 관해서는 영국 사례를 참고할 수 있다. 영국노총(TUC)은 기후위기를 "모든 일자리와 모든 노동자에게 영향을 미치는 노동운동의 핵심 의제"라고 선언한 2024년 결의안을 바탕으로 2025년 대의원대회에서 2026년을 '기후 행동의 해(Year of Climate Action)'로 공식화했다. 이 결의안을 주도한 TUC 가맹노조인 유니손(UNISON, 조합원 130만 명)은 올 1월, '기후 행동의 해' 선포식을 하고 다음과 같은 활동 계획을 제시했다.
첫째, 단체교섭에 '기후조항'을 체계화했다. 각 지부에 녹색 단체교섭 요구안을 배포하고, 지부 단체협약에 포함해야 할 표준 기후(녹색)조항을 제시했다. 핵심은 △사업장 탄소배출 공개 의무 △에너지 사용량 노사 공동 점검 △재생에너지 전환 일정 명문화 △폭염·홍수 등 기후재난 대응 안전기준 강화 등이다. 기후문제를 기업의 CSR 영역이 아니라 단체교섭 의제로 제도화하는 시도다.
예를 들어, 노조는 건물의 단열 개선과 LED 교체, 히트펌프 도입은 초기 투자비가 수백만 파운드에 이를 수 있으나, 장기적으로 에너지 비용을 20~40%까지 절감할 수 있다는 분석을 제시하면서 사용자들에게 투자를 요구하고 있다. 노조는 이 비용 투자를 장기적 재정 절감 및 고용 유지 전략으로 제시했다.
둘째, 녹색 대표(Green Representative) 제도를 강화했다. 기후·에너지 전환을 담당하는 조합원을 공식 임원 구조에 포함해 사업장 에너지 분석, 저탄소 조달 점검, 친환경 설비 도입 과정에서 노동자 참여를 제도화했다. 기후를 캠페인이 아니라 일상적 운영 의제로 만든 것이다.
셋째, 정의로운 전환을 요구했다. 공공건물의 에너지 효율 개선과 재생에너지 설비 확충 과정에서 직접고용 원칙을 유지하고, 노동자의 재훈련과 직무 전환을 보장하도록 했다. 예를 들어 보일러 시스템을 저탄소 설비로 전환할 경우, 설비 운영·유지관리 인력의 직무 재설계가 필요한데 이를 구조조정이 아닌 기술 전환 교육 기회로 설계하도록 교섭하고 있다. 즉 "탄소감축 = 일자리 축소"가 아니라 "탄소감축 = 기술·직무 재편을 동반한 고용 안정"이라는 프레임을 제도화하려는 것이다.
넷째, 기후재난 대응을 안전보건 의제로 묶었다. 폭염과 감염병 확산은 NHS 응급환자 증가와 직접 연결된다. 이는 곧 병원 노동자의 노동강도를 높이고 초과근무를 초래한다. 노조는 기후재난 대비 인력 충원과 함께 병원 내 냉방 설비 개선, 비상전력 시스템 확충, 고온 환경 근무 기준 마련 등을 요구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기후위기를 안전보건 비용과 연결하는 전략이다. 열악한 설비로 인해 발생하는 건강 피해와 초과노동은 결국 공공 재정 부담으로 돌아온다. 따라서 설비 투자와 노동자 보호는 비용 '증가'가 아니라 '절감'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다섯째, 연대 전략이다. 유니손은 기후정의 단체, 지방정부, 청년조합원 네트워크와 공동 캠페인을 전개하고 있다. 재생에너지 협동조합 프로젝트에 노조가 참여하고, 지역 차원의 에너지 전환 계획에 노동 관점을 반영한다. 이는 단순한 환경 연대가 아니다. 노조가 산업정책·지역정책 형성 과정에 개입하는 통로를 넓히는 전략이다.
제도 변화와 산업‧업종별 대응 가능성
영국 사례가 보여주는 핵심은 분명하다. '기후행동의 해' 선언은 상징적 행사가 아니라 노조의 자원과 역량을 어디에 집중할 것인지에 대한 전략적 결정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이 전략적 결정은 선언만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산업정책에 개입하려면 그에 상응하는 교섭구조와 제도적 통로가 필요하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최근 한국의 제도 변화는 기후의제를 구조 전환의 문제로 다룰 수 있는 교섭 공간을 넓힌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3월부터 개정 노조법이 시행된다. 실질적 지배력을 가진 사용자를 상대로 한 교섭이 가능해지면서, 원청의 책임을 직접 묻는 법적 기반이 확대된다. 이는 하청·재하청 노동자의 임금과 노동조건을 넘어서, 전환 비용 분담과 공급망 차원의 탄소감축 책임을 교섭 의제로 확장할 수 있는 제도적 공간을 연다.
대기업의 온실가스 배출은 자사 공장만이 아니라 공급망(Scope 3) 전반에서 발생한다. 그러나 감축 부담은 단가 인하나 납품 조건 강화의 방식으로 하청업체에 전가되는 경우가 많다. 설비 전환과 공정 개선의 비용도 최일선 협력업체와 그 노동자가 떠안는다. 노조법 개정은 바로 이 구조에 개입할 수 있는 통로를 넓힌다. 원청을 상대로 △공급망 탄소배출 정보 공개 △감축 비용의 원청 부담 원칙 △전환 과정에서 하청 노동자의 고용보장 △친환경 공정 설계에 노동자 참여 보장 등을 요구할 수 있는 근거가 강화된 것이다.
동시에 정부는 기업별로 분절된 단체교섭 구조를 넘어 초기업(산업·업종) 단위 교섭을 활성화하는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기후위기는 개별 사업장의 문제가 아니다. 철강, 자동차, 조선, 건설, 보건의료 등 각 산업은 생산공정과 에너지 사용 구조 자체를 바꿔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 특정 기업만 설비를 전환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산업‧업종 차원의 공동 기준, 전환 일정, 비용 분담 원칙, 노동 규범의 통일화가 함께 논의돼야 한다.
산업·업종 단위 교섭이 활성화된다면, 기후 의제는 다음과 같은 형태로 구체화할 수 있다. 산업‧업종 수준에서 △탄소감축 로드맵에 대한 노사 공동 합의 △전환기 고용보장 협약 △직무 재교육 및 숙련 전환 프로그램 공동 운영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 원칙을 포함한 노동조건 하향 경쟁 방지 장치 마련 등이다.
미룰수록 선택지는 줄어든다
이제 선택의 문제만 남는다. 기후위기를 올해 사업의 주변 의제로 둘 것인가? 아니면 산업구조 전환에 개입하는 핵심 전략으로 설정할 것인가?
기후위기는 대응을 미룬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미룰수록 비용은 증가하고, 전환의 방향 설정에 노동이 참여할 수 있는 여지는 줄어든다. 노조가 2026년 사업계획을 확정하는 이 시점이야말로, 기후를 핵심 의제로 재배치할 전략적 선택의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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