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금 없는 사회'는 얼마나 당연한가. 한국은 각종 상거래에서 현금 없는 결제가 일반화되더니, 급기야 공공 교통수단에서마저도 현금 결제가 차단되고 있다. '현금 없는 버스' 정책이다. 공공서비스의 보편적인 접근을 막는 문제임에도, 자연스러운 과정으로만 치부된다. 공공교통네트워크는 이에 '삶의 다양성을 지킬 수 있는 선택이 보장되는 사회가 더욱 자유로운 사회'라고 한다. 공공교통네트워트가 보내온 여섯 편의 기고로 '현금 없는 한국'의 문제를 돌아본다. 편집자
지방정부는 현금 없는 체계를 추진하면서 이를 거스를 수 없는 '글로벌 트렌드'로 묘사하곤 했다. 실제로 영국, 인도네시아, 튀르키예 등은 현금 없는 버스를 운영하고 있다.(한국과 다르게 현금으로 구매가 가능한 대안을 남겨두긴 했으나) 현금 사용률이 높은 독일 베를린도 지난해 9월 버스 현금 승차를 금지했다. 호주는 현금 운송을 사실상 독점하는 아마가드(Armaguard) 사가 현금 운용 감소에 따라 파산 위기에 처하자, 이 업체와 거래하는 8개 회사가 5000억 호주 달러(약 446억 원)를 투입해 현금 유통을 가까스로 유지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를 보고 현금 사용이 줄어드는 것만을 조명하는 건 절반의 사실만 확인하는 것일 뿐이다. 우리는 다른 면을 주목해야 한다. 현금 사용 선택권을 보장하려고 노력하는 시민과 정부가 있다는 사실이다.
현금은 상품·서비스 이용에 있어서 개인의 보편적 이용권을 보장하고, 자본과 국가권력의 감시 속에서 개인을 보호하는 주요한 수단이다. 국가 입장에서도 거시경제 주도권을 놓치고 싶지 않기에, 디지털 결제를 적극 추진하면서도 현금 사용을 막는 건 주저하기도 한다. 각 국가가 법률로써 현금 사용 선택권을 보장하는 이유다.
해외 사례를 확인하기에 앞서 한국 상황을 먼저 살펴보겠다. 한국은 '한국은행법'이 현금의 무제한 통용을 규정하고 있으나 이를 위반할 때 처벌하고 제재하는 규정은 없다. 주무 기관인 한국은행은 온오프라인으로 현금 사용 선택권을 홍보하며 이 권리를 보장할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지난해 5월, 23개 기관으로 구성된 화폐 유통 시스템 관계기관 협의회에서는 현금에 대한 접근성과 수용성이 후퇴하는 분위기가 당연시되는 상황을 우려하며, 현금 수취를 금지하는 버스 등의 문제에 대한 보완책을 논의했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법률 제정 움직임이 없지는 않다. 2019년 특정 지불 수단을 강요하지 못하는 전자금융거래법 개정안(더불어민주당 김두관 발의), 2022년 결제 수단을 자유롭게 선택할 권리를 명시하는 소비자기본법 개정안(국민의힘 이인선 발의) 등이 발의됐으나, 본회의를 통과하지 못했다. 2023년 국회 정무위원회 국민의힘 김희곤 의원은 '현금 없는 버스'에 대한 소극적 태도를 취하는 한국은행을 강하게 질타하며, 현금 결제권을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이에 따른 단점에 대해선 별도의 보완책을 마련하는 게 타당하다고 강조했다.
이와 같이 한국은 법률로 현금 사용 강행규정(강제 규정)을 두며, 이를 보완하기 위한 여러 입법적 움직임과 목소리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디지털 페이’ 앞서면서 현금 사용자도 적극 보호
북미와 유럽에서는 현금 사용 선택권 보장을 위한 사회적 움직임이 활발하다. 미국의 경우 뉴저지, 뉴욕 등 일부 주는 매장 등에서 현금 수취를 거부하지 못하도록 하는 법률을 시행하고 있다. 그 중 매사추세츠주는 1978년부터 소액 상거래에서의 현금 결제를 법적으로 보장하고 있으며, 2019년 필라델피아주에도 유사한 법률이 발효됐다.
덴마크는 2015년 지급카드법에 현금 결제 선택권을 명시했다. 노르웨이는 금융계약법 개정을 통해 자동판매기나 무인 가게가 아닌 모든 판매점에서 현금 결제를 거부하지 못하고, 이를 위반할 시 과태료를 부과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 사문화된 '현금으로 결제할 권리'를 실질적으로 보장했다. 디지털 결제가 보편화된 스웨덴의 경우, 2015년 최고행정법원은 환자가 진료비 등을 현금으로 낼 시 공공의료기관은 이를 수용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정부 차원에서는 2019년 지급결제서비스법 개정을 통해 예금 규모 700억 크로나 이상의 상업은행에서의 입·출금 서비스를 의무화하고, 2020년 중앙은행법을 통해 시중은행의 현금서비스 시행 및 현금 자동 입출금기(ATM) 설치를 의무화했다. 프랑스에선 판매점이 현금, 카드, 어음 중에서 두 가지 이상을 결제 수단으로 의무 선택해야 하고 이를 거부할 수 없다. 2010년부터는 동전과 지폐 수령을 거부할 때 최대 150유로의 벌금을 부과하고 있다.

사회적 합의로 이를 조율하는 곳도 있다. 네덜란드는 법으로 현금 거래 금지를 막고 있지는 않다. 다만 중앙은행, 재무부, 비자협회, 노인 및 장애인단체, 소상공인협회, 중소기업협회 등 이해당사자로 구성된 사회적 합의 기구 지급시스템포럼(NFPS)을 통해 현금 수취 거부나 현금사용자 차별 금지를 각 기구에게 권고했다. 이런 권고는 강제성은 없으나, 기구의 효용성을 봤을 때 효과가 없다고 볼 수는 없다. 네덜란드는 이를 통해 공공기관, 의약품 서비스, 대중교통 서비스 영역에서 현금 수취 거부를 방지하고 있다.
'디지털 페이' 결제가 보편화된 중국에서도 디지털 결제에 능숙하지 않은 노년층 등이 겪는 여러 가지 피해와 배제를 해결하고, 외국인의 접근성을 높이고자 정부가 개입하고 있다. 지난해 인민은행은 국무원 상무회의 승인 이후 상점과 택시 등에 소량의 잔돈을 제공해 거스름돈을 주는 데에 불편함이 없도록 했고, 문화관광부와 함께 현금 결제 거부에 대한 엄격한 단속을 요청하기도 했다.
현금 접근성을 보장하기 위한 실질적 조치도 시행되고 있다. 미국과 호주는 대형마트, 식료품점, 우체국, 주유소 포스(POS)기에서 현금 인출이 가능하다. 영국은 2021년 대형마트와 슈퍼마켓에서 물품을 구매하지 않아도 현금을 인출할 수 있도록 조치했다. 아일랜드는 한발 더 나아가, 국내 3대 상업은행의 ATM기 수를 얼마나 유지할지 재무부 장관이 정하도록 하는 정부안을 제출했었다. 수익성을 이유로 함부로 ATM기를 폐쇄하지 못하도록 한 조치로, 한국 화폐유통시스템 유관기관 협의회에서 언급된 ATM 축소 신중 필요성 강조와 맥락이 닿아있다.

‘함께 사는 사회’ 토론부터 하자
시민사회의 움직임도 활발하다. 스페인의 'Plataforma Denaria', 프랑스의 'CashEssentials' 등이 존재하며, 특히 2015년 설립된 스웨덴 시민단체 '현금 반란(kontantupproret·cash Uprising)'은 노년층 및 농촌 거주자 등을 대변하며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단체의 대표 비요른 에릭손(Björn Eriksson)은 지불 시스템의 완전한 디지털화의 위험성을 경고하면서 아날로그 시스템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누군가 오래된 방식을 가지고 최신 기술이 없다는 이유로 사회에서 완전히 배제되는 것을 비판하며, 디지털에 익숙한 젊은이들도 사생활 침해를 우려해 현금 사용으로 돌아서고 있다고 덧붙였다.
<현금 없는 사회(The War Against Cash)>를 쓴 로스 클라크(Ross Clark)는 2016년 인도의 고액권 화폐 개혁 당시, 회수되지 않은 구권은 3%에 불과했다고 언급하며, 이는 탈세 범죄자가 아닌 여러 사유로 은행을 갈 수 없는 일반대중에게 피해가 갔음을 강조했다. 또한 신간 도서 <현금의 힘: 지폐 사용이 개인과 사회에 좋은 이유(The Power of Cash: Why Using Paper Money is Good for You and Society)>의 저자 자고르스키(Jay L. Zagorsky) 보스턴대학교 교수도 한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현금이 소수집단으로부터 개인의 권리를 보호하고 외부 위험으로부터 사회를 안정화할 수 있는 장치임을 언급하며, 현금 옹호 단체의 필요성을 말했다.
현금 금지 사회에 따른 부작용과 이를 개선하기 위한 노력은 이미 외국에서 진행되고 있다. 한국 사회도 이를 유심히 파악해 시민들의 기본권을 보장하는 데 적극 반영해야 한다. 현금 사용은 시민 개개인의 판단에 따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대상으로 인식돼야 한다. 현금 사용과 관련된 문제는 공공정책의 영역이다. 이를 위해서는 법률적 보장과 시민의 행동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이를 위한 첫 시작으로, 모두에게 열린 토론 자리가 선행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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