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과일의 주연은 둘이다. 달콤한 향으로 입맛을 깨우는 복숭아, 시원한 수분감으로 체온을 낮춰 주는 수박.
시장에서는 수박이 먼저 등장하고 복숭아가 그 뒤를 잇지만 입맛이 먼저 끌리는 순서를 따라 복숭아부터 차근히 풀어본다.
입맛이 먼저 끌리는 순서를 따라, 복숭아부터 차근히 풀어본다. 향이 먼저 다가오는 과일이니, 이야기 역시 그 향에서 시작하는 게 자연스럽다.
복숭아(Prunus persica)는 중국 서북부를 기원지로 삼아 실크로드를 타고 서아시아, 유럽으로 퍼졌고 한반도에는 일찍이 조선 전기 문헌에 등장할 만큼 오래전에 자리 잡았다.
오늘 식탁에 오르는 복숭아는 겉보기엔 하나의 이름이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결이 다르다.
보송한 털과 부드러운 과육의 백도, 단단하고 선명한 색의 황도, 털을 거의 없앤 천도, 한 손에 쏙 들어오는 납작복숭아까지, 기호와 노동력을 고려해 세분화된 품종들이 계절을 이어 달린다.
산지에서는 저장성이 약한 복숭아의 약점을 보완하려고 숙기가 서로 다른 품종을 ‘릴레이’로 심어 출하시기를 길게 늘린다.
당도(대개 12~13 °Brix 이상)와 경도(물르지 않으면서도 씹히는 탄력)를 동시에 관리하기 위해 칼슘 처리를 강화하고 수확 직후 저온·저산소 상태를 유지하는 저장·유통 기술도 빠르게 정교해지고 있다.
영양 쪽에서도 복숭아는 생각보다 알차다. 과육의 대부분이 물이라 갈증을 달래기에 좋고, 칼륨과 비타민 C, 베타카로틴, 펙틴이 들어 있어 여름철 전해질 균형과 항산화 방어에 도움을 준다.
껍질과 과육의 폴리페놀(클로로겐산 등)은 산화 스트레스를 낮추는 데 기여하고 섬유질은 장 운동을 부드럽게 만든다.
'달아서 살찐다'는 오해도 있지만 복숭아 중간 크기 한 개(150~170g) 기준 열량은 60kcal 안팎으로 낮은 편이다.
맛있게, 그리고 길게 즐기는 법도 어렵지 않다. 껍질의 털이 거슬린다면 10초 정도 뜨거운 물에 데쳤다가 얼음물에 담가 한 번에 벗겨내는 블랑슈 방식이 가장 간단하다.
잘 익은 복숭아를 굵게 썰어 약불에서 설탕·레몬즙과 살짝 조린 콤포트는 요거트와 오트밀, 아이스크림 위에 얹어 일주일 내내 활용할 수 있다.
루콜라·모짜렐라와 섞어 올리브오일, 발사믹을 뿌리면 기름진 고기 요리를 깔끔하게 정리해 줄 여름 샐러드가 되고, 잘게 다져 라임과 칠리를 섞으면 생선구이·타코 위에 올리는 복숭아 살사로 변신한다.
산지에서는 상처나 모양 때문에 상품성이 떨어지는 과실을 잼·퓨레·발효 음료로 돌리는 실험이 이어지고 있어 버려지는 복숭아의 비율을 줄이는 순환 구조도 조금씩 자리 잡는 중이다.
이어서 수박(Citrullus lanatus)을 살펴보자. 수박은 아프리카 사하라 남단과 나일강 유역에서 출발해 교역로를 따라 중앙아시아와 중국을 거쳐 고려 시기에 한반도에 들어왔다.
오늘날엔 비닐하우스와 저온 유통망 덕분에 6월이면 이미 전국 진열대에 자리 잡는다.
더위가 본격화되면 미니 수박, 씨가 적은 수박, 노란 수박처럼 다양한 크기와 색의 변주가 등장해 '작게, 자주' 소비하고 싶은 수요까지 흡수한다.
기후변동 탓에 수확량과 당도가 함께 흔들리기 쉬운 품목이라 재배 측면에서는 열과(裂果)와 바이러스에 강한 접목 재배, 과습·고온을 피하는 스마트팜 환경 제어가 필수 요소로 떠올랐다.
수박의 장점은 단순하지만 강력하다. 과육의 90% 이상이 물이라 갈증 해소에 직관적으로 뛰어나고 칼륨·비타민 A·C가 여름철 전해질 보충에 도움이 된다.
붉은 과육을 물들이는 라이코펜은 대표적인 항산화 카로티노이드로 토마토 못지않은 함량을 보인다.
아미노산 시트룰린은 혈관 이완과 혈류 개선에 관여해 여름철 운동 후 회복 식단에서 자주 언급된다.
버릴 것도 거의 없다. 씨에는 아르기닌과 마그네슘이 풍부해 가볍게 볶아 소금만 약간 뿌려도 훌륭한 스낵이 되고 초록 껍질의 흰 속살은 얇게 저며 절여 피클로 만들면 아삭한 식감과 산미가 의외로 고기 요리와 잘 맞는다.
현대식 활용법은 무궁무진하다. 잘게 썬 수박에 올리브오일, 라임, 페타치즈, 민트를 더하면 지중해풍 수박 샐러드가 되고, 믹서에 갈아 얼음과 함께 블렌딩하면 설탕을 많이 넣지 않아도 충분히 달콤한 스무디가 된다.
과육을 걸러낸 주스에 질소를 주입해 미세한 거품을 살린 나이트로 수박 주스 같은 변주도 등장했다.
과즙이 많은 특성 덕분에 RTD(Ready-To-Drink) 음료로도 가공하기 쉬워 여름 한정 음료 시장에서 빠지지 않는 소재가 됐다.
두 과일의 시장 흐름은 비슷해 보이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다르다.
복숭아는 최근 몇 년 사이 재배면적이 조금씩 늘며 “여름 과일의 주도권이 복숭아 쪽으로 이동한다”는 얘기가 산지에서 나온다. 무털(스무스 스킨) 복숭아, 조생종, 납작복숭아 같은 신품종이 늘고, 디지털 육종과 저장 기술이 결합하면서 '달고 단단한 복숭아를 오래'라는 소비자 요구에 한 발 더 다가선 덕분이다.
반면 수박은 면적 자체는 큰 변화가 없지만 폭염과 장마가 번갈아 오는 해에는 당도와 생산량 모두 요동친다. 이 때문에 소형·절단·컵 과일, 그리고 냉장 RTD 주스 같은 형태 다변화가 가격 변동을 완충하는 시장 전략으로 정착했다.
공통점도 있다. 두 과일 모두 포장재를 바꾸려는 시도가 활발하다. 복숭아는 생분해성 펄프 완충재를 수박은 스티로폼 대신 천연 섬유 그물을 시험 중이다.
못난이·낙과를 잼·페이스트·음료로 돌려 식품 손실을 줄이는 움직임도 커지고 있다.
기후 스트레스가 커질수록 저장·가공·유통의 정밀화는 선택이 아니라 생존 전략이 된다.
그렇다면 이 두 과일은 어떻게 고르고, 어떻게 먹으면 좋을까?
복숭아는 향이 강하고 손으로 살짝 눌렀을 때 탄력 있게 들어가면 당도와 숙성이 맞아떨어졌을 확률이 높다.
과육이 단단한 조생종은 상온에서 하루 정도 더 두었다가 먹으면 향이 살아난다.
물러짐이 빠르니 구입 후 1~2일 안에 먹거나 바로 콤포트·잼으로 돌려 저장성을 올리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수박은 껍질 무늬가 선명하고 광택이 있으며 밑둥(밭에서 닿아 있던 면)이 황갈색으로 적당히 넓을수록 충분히 익은 경우가 많다.
통째로 사서 바로 다 먹기 어렵다면 미니 수박이나 절단 수박을 선택해 낭비를 줄이는 것도 방법이다. 잘라 보관할 땐 랩을 촘촘히 씌워 냉장 2~3일 안에 먹는것이 좋다.
복숭아는 향으로 시작해 과즙으로 끝나는 과일이고 수박은 한입 베어 물면 물처럼 흘러내리는 수분으로 여름을 진정시킨다.
하지만 그 한입 속에는 수천 년의 이동 경로, 품종을 골라낸 육종가의 손끝, 기후와 맞서 싸우는 농가의 기술, 그리고 식탁에서 버려지는 것을 줄이려는 새로운 시도가 함께 들어 있다.
여름은 짧고, 제철은 더 짧다. 코끝을 잡아끄는 복숭아로 시작해 체온을 낮춰 주는 수박으로 마무리하는 방식으로 입맛이 먼저 끌리는 순서대로 올여름도 풍성하게 지나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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