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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찢어진 눈" 놀림 받던 나, 한국에서 엄마의 입양 기록을 찾다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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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찢어진 눈" 놀림 받던 나, 한국에서 엄마의 입양 기록을 찾다보니…

[한국 입양인 2세 이야기] ③ 소속을 연기하기 (Performing Belonging)

"저는 백인 벨기에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처음에는 단순해 보이는 이 말은, 사람들이 제 아시아인 외모를 보고 출신을 묻는 순간 자주 꺼내는 대답입니다. 보통 이어지는 질문은 "한국어 할 줄 아세요?" 혹은 "한국에 가 본 적 있나요?"입니다. 저는 당당하게 한국에 두 번 가봤다고, 지난해부터 한국어 수업도 듣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늘 이중적인 감정이 뒤따릅니다. 진짜 같지 않은, 어딘가 인위적인 느낌. 언젠가는 두 질문 모두에 크게 "예"라고 답할 수 있는 제 모습을 꿈꾸면서도, 사실 꼭 그럴 필요는 없는 제 자신을 계속 비교하게 됩니다. 그리고 어머니가 세 살에 한국에서 입양되었다는 사실을 말하면, 사람들은 종종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많은 이들이 입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입양인과 그 자녀들에게 제도적·법적·정체성 차원에서 어떤 파장을 주는지 전혀 모르는 것이지요.

입양 서류에 따르면 어머니는 1972년생이고, 1년 뒤 부산에서 경찰에 의해 길 위에서 발견되어 인근 고아원에 보내졌습니다. 그곳에서 지내다가 1975년, 앤트워프의 백인 벨기에 가정에 입양되었습니다. 그리고 같은 도시에서 자라, 1998년 그곳에서 제가 태어났습니다.

▲필자의 가족 사진. ⓒ필자 제공

부모님과 여동생과 함께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저는 일찍이 '다르다'는 감각을 알아차렸습니다. 아이들이 저를 "차이니즈"라 부르거나 "찢어진 눈"이라 놀릴 때도 있었지만, 그보다 제 거울 속 얼굴은 아버지 쪽 가족이나 친구들과 뚜렷이 달랐습니다.

어머니는 친생부모를 알지 못했고, 입양가족과도 일찍 연락을 끊으셨기에, 제 어린 시절은 거의 백인 사람들과의 교류로 채워졌습니다. 입양이나 한국적 뿌리에 대한 대화는 집에서 거의 없었습니다. 어느 날 제가 놀림을 받고 집에 와서 "중국인이라고 불렸다"고 말했을 때, 어머니는 단순히 "나는 중국인이 아니고 한국인이라고 해라"라고 답했습니다. 그 이상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한국인'이란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저와 무슨 관련이 있는지는 전혀 설명되지 않았습니다. 나라, 언어, 문화, 음식에 대한 지식은 가정에서 전해지지 않았고, 이 공백이 채워지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다문화 도시 앤트워프에서 자란 경험은 제 자의식을 키우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10대 시절, 저는 이주 배경을 가진 또래들과 가까워졌습니다. 그들이 모국어로 대화하거나 여름에 고향을 방문한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면, 저는 알 수 없는 부러움을 느꼈습니다. 저도 그런 말을 하고 싶었으니까요.

제 "플랑드르식" 양육과 상관없이, 사람들은 저를 늘 "한국인" 혹은 적어도 "아시아인"으로 보았습니다. 중국계나 베트남계 친구들과 함께 학교에 다녔지만, 한국인을 만난 적은 없었습니다. 앤트워프의 한국인 공동체는 매우 작았으니까요.

그 반작용으로 저는 '전형적인 아시아인' 이미지를 일부러 흉내 내곤 했습니다. 모두가 브루스 리와 성룡을 멋있다고 했기에, 저는 그들과 자신을 동일시하며 무에타이를 배우고, 스스로를 "웡(Wong)"이라 불렀습니다. 강해 보이고, 눈에 띄는 개인이 됨으로써 제 설명을 덜어내고, 진짜 같은 나 자신으로 남고 싶었던 겁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야 본격적인 자기 탐색이 시작되었습니다. 2017년 부모님의 이혼은 큰 충격이었지만, 동시에 저 자신에게 집중할 자유를 주었습니다. 저는 역사학을 공부하며 과거를 더 객관적으로 탐구하고 싶어졌습니다.

그리고 2019년, 친구와 함께 처음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그 경험은 제 눈을 열어주었고 더 큰 관심으로 이어졌습니다. 특히 어머니가 지냈던 고아원을 방문한 순간이 가장 인상 깊었습니다. 그곳 사회복지사들이 제게 어린 시절 어머니의 사진이 담긴 자료를 건네주었는데, 그건 제가 처음 보는 모습이었습니다.

석사 과정에서는 벨기에 내 한국 입양인들의 정체성 형성 경험을 주제로 논문을 쓰기로 했습니다. 관련 지식이 전혀 없던 저에겐, "나의" 역사에 몰입하고 한국 입양인들과 연결될 기회였죠. 연구를 거듭하며 곧 드러난 것은 국제 입양의 문제적 성격이었습니다.

냉전이라는 넓은 맥락 속에서 서구와 (이전) 제3세계 국가들 간의 신식민주의적 역학이 얽힌 역사였죠. 제 어머니와 제가 인터뷰한 다른 입양인들이 모두 이 역사 속 일부였다는 사실은 동시에 매혹적이고, 아프게 다가왔습니다. 제 또래 친구들의 부모와 달리, 그들은 의식적으로 먼 나라를 선택해 이주한 것이 아니었으니까요.

논문은 지도교수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아, "초국가적 입양을 넘어: 비판적이고 다양한 대화" 라는 책에 실릴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또 다른 인연으로 <코리아타임스>에 제 경험을 기고하기도 했습니다. 그 직후 처음으로, 제 글을 읽은 한 DoKAD(Descendants of Korean Adoptees, 한국 입양인 2세)와 연결되었습니다. 우리는 통화하며 서로의 경험을 나눴습니다. 제게 그것은 큰 의미였는데, 저와 비슷한 사람과 대화한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제 정체성 탐색에 새로운 차원이 열린 순간이었습니다.

저는 1세대 한국 입양인들의 경험뿐 아니라, DoKAD로서 우리의 위치도 소중히 여겨져야 한다고 믿습니다. 우리 역시 이 역사 속에서 탄생했지만, 입양 자체의 트라우마는 겪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닮았지만, 다릅니다. 또한 친생가족을 찾을 자원이 부족한 DoKAD들은 입양인들처럼 최소한의 권리조차 보장받지 못합니다. 제 경험상, 진정한 정체성과 가계 계보를 얻지 못하는 결핍이 가장 큰 아픔입니다. 저는 앞으로 이 부분에 변화가 있기를 바랍니다.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 누구인지를 알 권리는 훨씬 더 주목받아야 하고, 한국 당국은 이를 위해 훨씬 더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합니다.

2024년 9월 두 번째 한국 방문에서, 이번에는 어머니와 함께 홀트(Holt)와 중앙입양원(NCRC)에 가서 어머니의 기록을 확인했습니다. 그러나 협조와 노력이 현저히 부족하다는 점을 바로 깨달았습니다. 그렇다면 완전히 혼자 힘으로 모든 걸 감당해야 하는 DoKAD들에게, 그러나 그럼에도 분명히 답을 받을 권리가 있는 그들에게, 이 현실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어머니가 지냈던 고아원을 찾은 필자(오른쪽) ⓒ필자 제공

기획: 한국 입양인 2세(DoKADs) 마이테 마음 & 마릿 킴

번역:김혜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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