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오웰. 나는 그를 이렇게 소개한다.
르포르타주계에서 최고로 유명한 선배.
"르포르타주'를 아시나요?" 물으면 아는 이 없어도, "조지 오웰을 아시나요?" 하면 다들 끄덕인다. 조지 오웰이 르포르타주(아래 르포) 작가라고 하면 다시 한번 끄덕인다. 역시 유명 작가다. 그렇지만 그의 르포 작품 <위건 부두로 가는 길>, <카탈로니아 찬가>는 <동물 농장>보다 훨씬 덜 알려져 있다. 르포가 무엇인지 알게 된다면 사람들은 분명 매료될 텐데. 르포뿐 아니라 모든 '기록글'이 사람을 끄는 힘이 있다고 믿는 나로서는 그 점이 아쉽다. 그러니 르포가 무엇인지부터 이야기해 보자.
르포란 무엇인가?
대중 강좌에선 르포라는 장르를 설명하기 위해 이따금 다큐멘터리 영화를 가져온다. 다큐 영화는 다들 아니까. "다큐멘터리 영화 아시지요? 그걸 글로 쓴다고 생각하면 떠오르는 어떤 형태가 르포르타주라고 생각하셔도 좋습니다." 정확한 설명은 아니다. 편의를 위해 선택한 방식이다.
사람들이 다큐 영화를 빗대어 떠올릴 '어떤 형태'라는 것은 이러하지 않을까.
픽션이 아닌 실제 현실을 다룬다.
취재·기록을 바탕으로 한다.
단순 정보 전달이 아닌, 기록자의 시선과 문제의식이 담긴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취재하는 대상과 관계를 맺는다. 직접적으로.
이 지점에서 르포를 비롯한 기록 글의 고유한 특성이 생겨난다. 기록이 어려운 이유이자, 동시에 기록자들이 이 장르를 사랑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기록자는 자신이 만나고 기록하려는 대상에게 얽매이고, 때론 서로가 엉킨다.
그를 알고자 하는 기록
'현대 사회에서 얽매이고 엉키는 거 좋아하는 사람이 있나? 우리는 모두 자유인인데?' 이리 반문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우리가 오롯이 자유인이었다면, 그것이 온전히 가능했다면, 사는 일이 이토록 괴롭진 않을 테다. 우리에겐 늘 골칫거리가 있다. 그게 가족일 수도, 연인일 수도, 직장 동료나 상사일 수도. 어쩌면 더 큰 시스템의 문제일 수도 있다. 아니면 진짜 '나쁜 놈'이 있던가. (요즘 나의 골칫거리는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다.)
르포-기록 수업 때 만난 수강생들은 이런 이야기를 쓰고 싶다고 했다.
이주민이 모여 사는 자신의 동네 이야기, 자신처럼 만성질환에 시달리는 청년들 이야기, 자판기 앞 커피 한 잔에 온기는 느끼는 물류센터 동료들 이야기 등.
동네 사람부터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사람까지, 기록하고자 하는 대상은 다양했다. 실제 출판된 기록물들도 비슷하다.
길고양이의 하루를 쫓는 이도(<사람의 일과 고양이의 일>), 요양보호사로서 돌봐 온 어르신들의 인생을 기록한 이도( <천당허고 지옥이 그만큼 칭하가 날라나?>), 가족의 노동사를 기록한 이도(<워킹푸어 가족의 가난 탈출기>) 있다. 광주부터 진도까지, 곳곳에서 현대사의 '사건'을 기록한 이들도 있다(<민중을 기록하라>). 사건을 기록한다는 것은 그 사건의 자장 안에 머무는 이를 만나는 일이기도 하다.
기록하려는 대상은 다양해도 이들에겐 공통점이 있다. 대부분 잘 모르는 사람(혹은 존재, 사건)이라는 점이다. '그'를 너무 잘 알아서 기록하려는 경우는 드물다. 오히려 그를 알고자 기록한다. 그가 자꾸만 "왜?"라는 질문을 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나를 설명하는 글쓰기
기록 과정에서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대상과 친해지거나 거리를 좁힌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를 알고자 하는 것이다. 이 바람은 타인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전제로 한다. 마주하고 대화하고 함께 부대끼는 과정을 통해 이해가 가능하리라는 믿음으로, 기록자들은 저마다의 현장으로 간다. 그 현장이 '나'일 때가 있다.
나의 경우, '성실하게 일하지 않는 사람들'을 알고 싶었다. 그전까지 나는 '성실히' 일해온 사람들에게 닥친 불행과 그로 인해 달라진 삶을 기록해왔다. '시키는 대로 열심히 일했는데 어느 날 몸이 아팠다.' 직업병의 서사는 대개 이러했다. 성실하게 일하다가 병에 걸린 나의 인터뷰이들, 그리고 성실하다 못해 과로하는 내가 있었다. 내 노동에 숨이 막힐 때, 나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알고 싶었다. 그래서 '성실하지 않은(않다고 여겨지는) 노동자'들을 만나러 갔다. 그게 책 <일할 자격>이 되었다. 책의 부제를 이렇게 잡았다. '게으르고 불안정하며 늙고 의지 없는… '나쁜 노동자'들이 말하는 노동의 자격'.
책을 쓰며 알아차렸다. 내가 알고자 했던 것은 '성실한-좋은-정상 노동자'라는 틀을 벗어나지 못하는 내 자신이었다. 책이 출간된 뒤, 어느 자리에서 질문을 받았다. "이제 그들을 이해하게 됐느냐"고.
나는 이렇게 답했다.
"그들을 이해하려 했던 나를 이해하게 되었다고."
나쁜 노동자가 되기 두려웠던 나를 알게 되었다. 그건 나의 세계가 달라지는 일이었다. "나를 나 자신으로 만드는 건 지금껏 나를 나로 살게 한 모든 것이다."(<죽은 다음>, 2025) 나를 나로 살게 한 그(것)들을 돌아본다. 이해하고자 한다. 그래서 기록한다. 기록을 통해 나를, 내가 딛고 선 자리를, 나의 세계를 알아간다.
세상을 부술 글쓰기
기록자는 이야기를 적는다. 내 앞에 그(인터뷰이)가 자신의 삶을 해석하고 재구성한 이야기를 받아 적는다. 동시에 이야기를 만든다. 그를 만나 세계가 흔들린 순간의 이야기를 만들어 간다. 그러니 기록을 통해 우리가 만들어내는 건 '관계'라고 부를 수 있겠다.
세상의 숱한 노동이 관계를 통해 이루어진다지만, 세계의 문을 두드려 만들어진 관계는 분명 다르다. 나를 끝내 뒤흔드는 관계는 쉽게 만날 수 없다. 이 흔하지 않은 경험을 나만 할 수 없다. 그러니 이야기를 함께 만들어갈 동료를 만나고자 한다. (그렇다. 이것은 <길동무 르포문학학교> 수강 신청을 독려하기 위한 글이다.)
종종 수업에서 이런 말을 한다. "여러분을 비롯해 기록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모두 글을 써서 그 이야기가 세상에 나왔다면, 세상은 지금과 전혀 다른 모습이었을 거"라고. 뮤리엘 루카이저의 말을 빌려와 변주한 것이다.
"만약 한 여성이 자기 삶에 대해 진실을 털어놓는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세상은 터져버릴 것이다."
나는 세상이 좀 터져버리길 바라는 사람이다. 여자가, 남자가, 인간이, 동물이, 가난이, 부유함이, 정상이, 장애가…. 이런 말이 헝클어져 터져버리길. 분류와 차별 속에 진실과 진심을 숨기는 세상이 터져버리길. 그러니 르포를 쓰고, 기록을 할 동료를 구한다. 함께 이 세상을 두들겨 금이 가게 할 동료를 기다린다. 혼자 두드리면 손이 아프지만, 함께 두드리면 노래가 된다고 믿으니까.
[2026년 길동무 르포문학학교 신청하기 바로 가기 : 클릭]
https://forms.gle/kjFBRRghjXYUvJfm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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