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은 뭘까? 사회구성원들이 받아들이는 '가족'의 의미가 다양해진 지는 이미 오래다. 결혼을 택하지 않은 비혼 동거인이나 결혼을 할 수 없는 동성 연인, 서로의 돌봄을 책임지는 친구나 매일을 함께 하는 반려동물 등에 '가족'이란 이름을 붙이는 것이 더 이상 낯설지 않은 사회다. 핵가족화를 걱정하던 교과서 속 문장은 1인 가구가 즐비한 오늘날의 도시를 보면 무색하기만 하다. 즉 "많은 사람들이 가족이라는 관계 형태에 의문을 품고,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정상가족의 바깥에서 살아가는 시대"(신경아), 바야흐로 오늘날은 <가족 없는 시대>다.
그러나 가족은 뭘까? 한편에서 법과 제도는 엄마, 아빠, 나, 동생이 혈연 및 혼인을 통해 안정적으로 결합해 있는 정상가족 모델을 여전히 고수한다. 개인이 사회구성원이라는 법적 지위를 획득하기 위해 각종 서류들로 '나'를 증명하듯 '가족'이라는 단위 역시 그렇다. 이성애 결혼이라는 제도적 뒷받침이 없을 때, 대부분의 개인들은 여전히 서로를 가족으로서 증명하지 못한다. 반대로 폭력이나 불화 따위의 구구절절한 사연에도 불구 혈연이라는 관계가 개인에게 끈덕지게 달라붙는다. 제도 아래 비정상가족은 구성될 수 없고, 정상가족은 해체되지 않는다.
국회에서 포괄적 차별금지법이나 생활동반자법 등의 법안이 발의될 때마다 따라오는 말이 있다. "제도가 삶을 포괄하지 못한다", "제도가 인식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기존 제도와 실제 삶 사이의 간근이 명백한 이 시대에서, 그 간극에 존재하는 개인들은 '공공의 부재'로 인한 상처와 고통들을 오롯이 홀로 견디고 있다. 하여 '가족 없는 시대'란 기존의 가족이 완벽히 해체된 상태를 뜻하지 않는다. 가족관계증명서로 증명할 수 없는 수많은 개인들의 시대, 제도로서의 가족으로 인해 역설적으로 '혼자의 삶'을 인정받지 못하는 시대, 곧 '내가 없는 시대'에 다름 없다.
<가족 없는 시대>는 저자 차해영의 가장 사적인 영역부터 가장 공적인 영역까지를 가족과 돌봄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하나의 서사로 묶는다. 여당 소속 현직 구의원인 저자는 구민들의 돌봄·자립 등을 정책적으로 고민하는 지역 정치인이지만, 동시에 혼자의 삶을 강요받기도 하고 반대로 혼자였던 삶을 부정당하기도 해 온 돌봄공백의 당사자기도 하다. 저자는 유년시절에 겪은 '가족의 부재'를 넘어, 개인적이고도 정치적인 노력을 통해 '가족의 재정립'을 이루어내는 듯하나, 제도는 그 노력을 비웃듯 '가족의 책임'을 그에게 다시 들이민다.
관계를 단절하다시피 했던 가족이 병에 걸린 채, 혼자가 되어 나를 찾아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가 나를 버리면서까지 선택했던 이들은 '가족'의 바깥으로 도망쳐버리고, 국가가 인정한 유일한 '가족'인 나에게 돌봄의 영수증이 갑작스럽게 청구된다면? 이해하기 힘든 상황 속에서 떠맡겨진 돌봄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저자의 기록은 개인이 느끼는 감정적 파동을 넘어 제도의 빈틈에 가닿는다. "돌봄과 의료, 장례와 상속, 주거와 행정 절차의 출발점이 한 명의 개인이 아닌 가족관계로 설정된 구조"는 더 이상 통계가 아닌 삶 그 자체로서 버겁게 다가온다.
한 순간에 무너진 일상을 어떻게든 부여잡고, 사회로부터 '버려진' 것만 같은 아버지를 돌보다 끝내 떠나보낸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아빠를 돌보던 시간, 그리고 아빠가 떠난 뒤 남겨진 절차들을 홀로 감당하던 시간은 내게 묵직한 질문을 남겼다. 내가 또다시 누군가를 돌봐야 하는 상황이 왔을 때, 혹은 내가 돌봄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되었을 때, 어떤 안전망 안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 그래서 나는 돌봄을 개인의 선의나 가족의 책임으로만 두지 않고, 어떤 사회가 되어야 하는지까지 함께 생각하게 됐다." (본문 중.)
정상가족의 부재로 의문에 휩싸였던 저자가, 새로운 관계를 꿈꾸며 정치에 뛰어들었지만, 끝끝내 정상성에 기반한 책임을 다시금 감당하게 되는 이 '징그러운 가족사'는 얼핏 아이러니다. 다만 낡은 정상성에 기반한 제도의 관점에서 볼 때 이 서사는 오히려 논리적이다. 가시화되지 않은 채 통계 안에서만 살아가던 누군가에겐, 애초부터 '가족'을 해체할 권리도 구성할 권리도 주어지지 않았다. <나 혼자 산다> 같은 프로그램이 비춰주는 선택적인 근사한 모습과 달리 우리에겐 혼자일 수 있는 권리도 혼자여도 괜찮을 권리도 없었다.
"정책은 늘 삶보다 뒤에 온다. 사람들이 먼저 다치고 무너진 다음에야 '그런 일이 있었군요' 하며 뒤늦게 이름을 붙인다. 그래서 많은 정책은 예방이 아닌 사후 수습이 된다. 문제는 그사이 사람들의 삶이 손상된다는 데 있다. 어떤 손상은 회복이 불가능하다. 정책이 무너진 삶을 수습하는 처리 과정이 아니라 삶이 무너지지 않도록 도와주는 장치로 기능하면 어떨까?" (본문 중.)
구의회 의원으로서, 때로는 시민사회 활동가로서, 또는 그저 아픔을 경험한 개인으로서 삶의 장면장면에서 제기하는 차해영의 고민은 이 권리부재의 상황을 아프게 찌른다. 그가 본인의 정치활동에서 역점을 둔 1인가구 정책은 단순한 정책 아이템이 아니라 "당사자들의 사정과 처지에 주목하겠다는 치밀한 생활정치"(최현숙)에 가깝다. 지자체들이 인구정책에 기반한 미혼남녀 만남 주관 사업 따위에 골몰하는 사이, 미혼도 남녀도 만남도 포괄하지 못하는 개인들이 여전히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이와 같은 '다른 고민'은 희망적인 일이다.
27일은 2024년 제정된 돌봄통합지원법의 전면 시행일이다. 돌봄이 필요한 노인이나 장애인 등에게, 그들이 병원이나 시설이 아닌 '자신의 집'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국가가 정책서비스를 지원하는 게 법안의 골자다. 예산과 재원에 대한 우려가 여전히 제기되지만, 그 우려 뒤에는 응급·의료·시설 등을 둘러싼 절차적 혼란 속에서 무너져내린 "한 사람의 삶"이 엄연히 있다. 저자와 아버지가 겪은 위기가 그랬고, 자립불가능성을 두려워하는 탈시설 장애인들이 그러하며, 증명되지 않는 가족관계 속에서 돌봄과 부양을 고민하고 있는 동성연인들이 또한 그럴 것이다.
비정상이나 예외, 혹은 특수한 사례 정도로 표현돼 온 그들의 삶은 사실 "더 이상 예외적인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때문에 그들에게 필요한 것도 "특별한 혜택이 아니라, 가장 가까운 사람이 위기 상황에서 역할을 할 수 있게 하는 최소한의 제도에 있다." 누군가에겐 낯설지도 모르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새로운 가족'의 시대를 열어야 한다. 서로를 통해 '나'를 지키는, 그러나 그 서로가 "꼭 가족일 필요는 없는" 존재들의 시대. 다시 말해 '예외가 일상이 된 세계'에서 저자는 함께 고민하자고 말한다. "그 누구도 자기 삶을 변명하지 않을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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