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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시대에 이 책, 강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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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시대에 이 책, 강렬하다

[최재천의 책갈피] <포식자들의 시간> 줄리아노 다 엠폴리 글, 이세진 번역

스페인 출신의 정복자 에르난 코르테스의 상륙 소식이 아스테카 제국의 수도에 도착했을 때 황제 모테쿠소마 2세는 가장 가까운 조언자들을 불러들였다. 어떻게 해야 하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황제는 어느 시대에나 정치인들이 이런 상황에서 할 법한 일을 했다. '결정을 내리지 않겠다는 결정' 말이다. 황제는 굴욕을 무릅쓰고서라도 전쟁을 피하려다가 굴욕과 전쟁을 모두 겪고 말았다.

"지난 30여 년간 서양 민주주의의 정치 지도자들은 16세기 아스테카인들을 그대로 빼다 박은 태도로 첨단 기술의 정복자conquistador들을 대했다. 그들은 인터넷, 소셜 네트워크, 인공 지능의 천둥 벼락 앞에서 요정의 가루가 자기들에게도 다소나마 떨어지기를 바라며 납작 엎드렸다."

프랑스에서 태어났고 이탈리아와 스위스 국적의, 정치인 출신이자 현재는 정치평론가이자 소설가인 줄리아노 다 엠폴리가 "아스테카 서기관의 관점에서, 나름의 방식으로, 이러한 사실들을 이야기하기 위해" <포식자들의 시간>을 썼다.

우리 시대는 "마키아벨리적 시간"이다. 새로운 정복자들이 나타났다. 이들이 혼란을 조장하고 있다. 하지만 대응은 형편없다. "포식자들의 시대에 전 세계의 보르자형 인간들은 자기가 지배하는 영토를 디지털 정복자들에게 실험실로 내어 주고 있다." 이 뿐 아니다.

"이번에 선출된 미국 대통령은 일말의 가책도 없는 독재자, 테크 정복자, 수구 세력, 대놓고 싸우고 싶어 안달 난 음모론자의 잡다한 행렬을 선두에서 이끌고 있다." 민주적 리더십은 테크 억만장자들에게 잠식되고 있고 절대권력은 시민의 기본권을 억압한다.

"괴테는 작센의 늙은 공작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이 공작은 워낙 성격이 있고 고집이 센 사람이었기 때문에 중요한 결정을 내리기 전에 찬찬히 생각하고 이모저모를 고려하라는 압박을 받았다." "나는 찬찬히 생각하기도 싫고 이모저모 고려하기도 싫소이다. 그럴 거면 작센 공국의 수장을 왜 한단 말이오?"

인공지능과 알고리즘, 기계적 문명이 세상을 지배한다. "그런 탓에 우리 민주주의 체제들의 운명은 점점 더 전 지구적 규모의 '디지털 소말리아'-무정부 상태에 가까운 하나의 실패한 국가-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있다. 디지털 군벌들과 그들의 민병대의 법만이 그곳을 지배한다."

작은 문고판 크기지만 강렬하다. 단숨에 읽어내렸다.

유럽 지성의 품격과 비판적 사유체계를 보여주는 아름다운 책.

▲<포식자들의 시간> 줄리아노 다 엠폴리 글, 이세진 번역 ⓒ을유문화사

최재천

예나 지금이나 독서인을 자처하는 전직 정치인, 현직 변호사(법무법인 헤리티지 대표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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