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이 시작되고 한 달이 지나도록 세계인의 눈길은 온통 미국으로 쏠렸다. 이란 시위를 비롯해 다른 심각한 사건들이 많았지만, 2기 트럼프 정부의 광기 어린 행보 탓에 미국발 뉴스가 모든 언론의 헤드라인을 독점했다. 베네수엘라 대통령을 납치하더니 그린란드를 차지하겠다고 위협했다. 파시스트 민병대나 다를 바 없는 이민세관단속국(ICE) 요원들을 풀어 민주당 지지 성향 주에 준계엄상태를 만들려던 시도는 결국 두 명의 시민의 목숨을 앗아갔다. 최근에는 관세 카드를 다시 꺼내 한국을 협박하는가 하면 쿠팡을 편들며 내정에 간섭하려 든다.
2기 트럼프 정부가 1기보다 더 권위주의적일 것이라 장담하던 논평가들마저 예상을 훨씬 더 뛰어넘는 광란에 당황하는 지경이다. 지금껏 벌인 작태만으로도 트럼프 대통령은 헌법 위반으로 탄핵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하원 435석 중 218석, 상원 100석 중 53석을 공화당이 쥐고 있기에 탄핵이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사법부가 트럼프 정부의 난동을 막는 방파제 역할을 제대로 하느냐면, 이것도 의심스럽다. 연방대법관 9인 중 6인이 공화당 대통령이 지명한 대법관이다. 그래서인지, 애초에 '위헌' 결정이 나올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되던 관세 정책에 대한 판결은 계속 지연되고만 있다.
심각한 상황이다. 많은 이들이 벌써 중간선거가 과연 제대로 치러질지 우려하고 있다. 트럼프를 심판하자는 여론이 거세질수록 집권 마가(MAGA) 세력은 중간선거를 사실상 '내전'에 가까운 형태로 몰아갈 것이다. ICE 요원들을 통해 민주당 지지 성향 주의 투표를 방해하거나 비백인 유권자의 투표를 가로막을 것이고, '부정선거'라 딱지 붙여 개표를 방해할 것이다. 그래서 중간선거 결과 집계 자체가 무의미해지도록 만들 것이다. 그 다음은? 250년 가까운 미국 '민주주의'가 지금 낭떠러지 앞에 서 있다.
미국만의 문제는 아니다. 민주주의가 전복될지 모를 위험과 마주한 유서 깊은 '민주주의' 국가가 하나 더 있다. 이 나라가 겪을 재난은 어쩌면 미국의 경우보다 더 충격적일 수도 있다. 바로 영국이다.
보수당의 몰락을 똑같이, 그러나 더 빠르게 반복하는 노동당
현재 영국 집권당은 키어 스타머 총리가 이끄는 노동당이다. 하원 650석 중 404석을 차지하고 있으니 꽤 '안정적인' 단독 내각이다. 이 수치만 보면, 영국에 무슨 '민주주의의 위기'인가 싶다. 그러나 이런 안정적 의석에도 불구하고 스타머 정부가 제대로 하는 일이 없으니 그게 문제다.
2024년 6월에 스타머 정부가 출범하고 나서 불과 한 달만에 영국에서는 격렬한 인종주의 폭동이 벌어졌다. 초등학생들이 살해된 비극적 사건의 범인이 '무슬림'이라는 가짜 뉴스가 돌자 곧바로 극우 시위대가 주위의 모스크로 몰려가 난동을 부렸다. 경찰이 막아서자 시위는 폭동으로 비화했고, 이후 한 달간 폭동의 불길이 영국 전역을 휩쓸었다.
물론 이 폭동을 당시 갓 집권한 스타머 정부의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 다만, 영국 사회 상태가 이 정도로 심각하다는 사실을 확인했다면 새 정부는 마땅히 비상 조치에 나서야 했다. 실제로 스타머 정부는 '비상 조치'를 밀어붙였는데, 그 내용은 전임 보수당 정부가 물려준 재정난을 줄이기 위한 복지 예산 축소였다. 자녀가 셋 이상이면 추가 아동수당을 주지 않는다, 장애인 연금을 줄인다, 노인들에게 겨울철 난방비 지원을 끊는다, 등등. '노동'당 정부가 생활비 상승으로 인해 불만을 쏟아낼 데만 찾아 헤매는 이들을 다독이기는커녕 분노에 불을 붙이는 긴축 정책을 펼친 것이다.
이것만이 아니었다. 지난 1년 반 동안 스타머 정부는 마치 스스로 지지층을 갉아먹지 못해 안달이 난 것만 같은 모습으로 일관했다. 가자 학살이 벌어지는 와중에 이스라엘을 편들면서, 학살 반대 시위에 나선 자국 시민들을 '테러리스트'로 몰며 무차별 체포했다. 반이민 여론을 '흡수'한답시고 '영국이 이방인의 땅이 됐다'는, 극우파를 따라 하는 연설을 늘어놓다가 극우파로부터는 조롱을, 노동당 지지층으로부터는 항의를 받았다.
화룡점정은 최근 공개된 엡스타인 파일이다. 엡스타인 파일에는 신자유주의 전성기에 세계를 주무르던 수많은 권력자들의 이름이 등장하지만, 그 중에서 가장 빈번히 오르내리는(무려 6000번 언급된다) 이름 중 하나는 피터 맨델슨이다. 맨델슨은 '신노동당' 시기(1990-2000년대)에 토니 블레어나 고든 브라운을 배후 조종하면서 '제3의 길' 노선을 주도한 노동당 실세였다. 2010년대 말에는 '이스라엘 비판 = 반유대주의' 카드를 무기 삼아 제러미 코빈을 당에서 숙청하는 데 앞장서기도 했다.
스타머는 주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 당 내 '원로'를 주미국 대사로 임명했다. 그런데 엡스타인 파일 공개를 통해, 맨델슨이 엡스타인의 절친이었고 심지어는 엡스타인이 2008년 아동 성폭력 건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뒤에도 친분을 유지했음이 드러났다. 게다가 맨델슨은 엡스타인에게 영국 정부의 내부 정보를 넘기기까지 했다. 스타머 총리가 이런 인물을 측근들의 반발을 뿌리치면서까지 멘토로 예우했으니, 이것은 맨델슨의 불명예 은퇴로 끝날 문제가 아니다. '제3의 길'의 거탑이 무너지면서 스타머 총리 역시 함께 휩쓸려가야 할 처지다.
이미 영국 언론은 스타머 총리가 사임하고 노동당의 새 대표-총리가 선출될 것이라는 전제 아래 차기 총리 하마평을 싣고 있다. 전임 보수당 정부도 집권 중(2010-2024년)에 총리를 4번이나 갈아치운 바 있다. 그러니 스타머라고 봐줄 이유가 없다. 다만, 그렇게 총리를 바꾸면서 보수당은 지지층이 꾸준히 감소했다. 2024년 총선도 실은 노동당의 승리라기보다는 보수당의 패배였다. 그런데 보수당이 5명의 총리를 거치며 14년의 세월 동안 도달한 결과(지지율이 40%에서 20%로 반토막 났다)를 스타머의 노동당 정부는 불과 1년 반만에 달성했다. 요즘 노동당 지지율은 최대치가 20% 초반을 넘지 못한다.
미국보다 더 쉽게 민주주의가 전복될 수 있는 나라, 영국
문제는 보수당과 노동당의 몰락이 영국개혁당(UK Reform) 돌풍으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영국개혁당은, 본래 보수당원이었다가 1990년대부터 반유럽연합-반이민-반무슬림 선동으로 악명을 떨친 나이젤 패라지가 2018년에 창당한 극우 정당이다. 트럼프와 일론 머스크가 연대감을 표하는 정당이고, 재작년 여름의 인종주의 폭동에 동참한 이들이 열렬히 지지하는 정당이다.
오랫동안 영국 정치 전문가들은 영국 풍토에서는 신생 극우 정당이 성공하기 쉽지 않다고 전망했다. 잘 알려져 있듯이, 영국은 미국처럼 무려 18세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선거제도, 즉 단순다수대표제(소선거구제)를 고집한다. 20세기 말에 신설된 스코틀랜드 의회, 웨일즈 의회는 독일과 비슷한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채택했지만, 연합왕국(UK) 전체를 관장하는 웨스트민스터 의회의 하원의원들은 100% 소선거구제로 선출된다. 전문가들은 이런 소선거구제에서는 기존 양대 정당으로 표가 쏠릴 수밖에 없기에 신생 정당이 약진할 수 없다고 장담했다. 오랜 역사를 자랑하면서도 만년 소수 제3당 신세인 자유민주당이 그 확실한 증거였다.
그런데 전문가들이 미처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 도래했다. 굳건할 것만 같았던 기존 양대 정당 중 한 축, 보수당이 급격히 지지를 잃기 시작한 것이다. 당선 가능한 두 세력 중 한 쪽을 밀어야 한다는 승자독식 선거제도의 관성은 남아 있는 상태에서 보수당이라는 축이 무너지자, 보수당을 대신해 노동당 반대편을 대표할 정당으로 영국개혁당이 급부상했다. 이미 2020년대 초부터 보수당 실망층이 영국개혁당으로 몰려, 2024년 총선에서는 이 당이 총 투표자의 14.3%로부터 지지를 받으며 패라지를 포함한 5명의 하원의원을 배출했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총선 이후 여론조사에서 더 많은 보수당 실망층이 영국개혁당으로 지지를 옮기는 양상이 나타났고, 덕분에 2024년 말이 되면 보수당과 영국개혁당 지지율이 비등해진다. 그리고 다시 몇 달 뒤인 2025년 봄부터는 영국개혁당 지지율이 보수당 지지율을 확실하게 추월했고, 급기야는 집권당인 노동당 지지율까지 따돌리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지금까지 1년 가까이 영국개혁당은 모든 여론조사에서 부동의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영국개혁당이 늘 30% 안팎의 지지를 받고, 노동당과 보수당 지지율은 20% 선을 오르내린다.
이 상태에서 선거가 실시되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2월 26일에 맨체스터 광역시 내의 '고튼 앤 덴턴' 선거구에서 치러지는 하원의원 보궐선거가 그 결과를 미리 보여줄 것이다. 맨체스터라면, 노동당의 표밭이다. 현 맨체스터 광역시장도 노동당 내 온건좌파인 앤디 버넘이고, 석연치 않은 이유로 의원직을 사임한(인종차별-성차별 망언을 일삼았다) 전임 하원의원도 노동당 소속이었다. 지난 총선에서 노동당이 받은 표는 50%를 넘었다. 즉, '고튼 앤 덴턴' 보궐선거는 노동당에게는 이겨야 본전인 선거이고, 패배하는 순간 노동당 전체가 격랑에 휩싸일 수밖에 없는 전투다.
그런데 지금 그런 일이 벌어질 판이다. 스타머를 제치고 대표-총리로 선출될 야심에 불타는 버넘 시장이 시장직을 내려놓고 보궐선거에 도전하겠다고 나섰지만, 스타머 집행부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버넘의 출마를 불허했다. 그러자 보궐선거 민심이 요동쳤다. 버넘을 노동당 후보로 넣은 여론조사에서는 노동당 지지가 53%가 나왔지만, 버넘을 빼고 묻자 영국개혁당이 36%의 지지를 받아 33%를 받은 노동당을 제치고 승리하는 결과가 나왔다. 흥미로운 점은 이 조사에서 녹색당이 21%의 지지를 얻으며 노동당을 바짝 뒤쫓았다는 것이다.
이 여론조사(Find Out Now, 1월 25-27일)만 해도 엡스타인 파일이 공개되기 전에 실시된 조사다. 맨델슨의 추악한 진상이 폭로되고 스타머가 그런 인사와 유착 관계에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 지금은 '고튼 앤 덴턴'에서 노동당 지지율이 더 추락하고 반대로 영국개혁당 지지율은 더 올랐을 것이다. '영국의 맘다니'라 불리는 잭 폴란스키 신임 당대표가 이끄는 녹색당은 아예 노동당이 아니라 녹색당 후보에게 표를 몰아줘야 '파시스트 영국개혁당'을 물리칠 수 있다며 유권자들을 설득하고 있다. 노동당이 오랫동안 써먹어온 '반우파 대동단결' 논리를 노동당에게 되돌려주고 있는 셈이다.
만약 이번 선거가 보궐선거가 아니라 총선이라면, 영국개혁당은 현 지지율로 하원에서 안정 과반수를 확보할 것이다. 지지층이 전체 유권자의 35%를 넘지 않지만, 소선거구제의 마법 덕분에 50%가 훨씬 넘는 의석을 차지하게 된다.
18세기에 제정된 뒤에 조금씩 수정되기라도 한 헌법을 가진 미국과 달리, 영국은 성문헌법조차 없다. 갑자기 과반 의석을 점한 극우 집권당이 하원에서 반민주적 법령(심지어는 민주 정체 자체를 폐지하는 법령)을 통과시키더라도 이를 막을 제도적 장치가 없다. 그때가 되면 독재나 내전을 막을 수단은 국왕과 상원의 '중세적' 권한 밖에 남지 않는다. 이것이 21세기에 영국이 처한 처참한 정치적 전망이다.
대한민국, 영미식 '민주주의' 교과서에서 하루빨리 벗어나야 한다
오늘날 영국, 미국이 봉착한 현실은 소선거구제에 바탕을 둔 양당 정치가 극우화를 막기는커녕 오히려 극우화에 가장 취약한 체제임을 보여준다. 비례대표제에 바탕을 둔 다당 정치는 그간, 신생 극우 정당이 쉽게 의회에 진출하도록 허용하는 단점이 있다는 지적을 받곤 했다. '정당투표 득표율 3%' 진입장벽이 위헌이라는 최근 대한민국 헌법재판소 판결을 우려하는 이들 역시 전광훈 세력의 자유통일당이 원내에 진출할 수 있게 됐다는 점을 그 근거로 든다. 일리 있다. 완전 비례대표제를 실시하는 많은 유럽 국가에서 덕분에 신생 극우 정당이 주요 정치 세력으로 급부상하곤 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서유럽식 다당 정치(소선거구제 원리가 일정하게 작동하는 프랑스, 이탈리아는 예외다)에서는 극우 정당조차 일정한 성장 이후에는 다른 정당들과 맺는 관계(연합이든 적대든)에 의해 규율 받는다. 이에 적응하느라 극우 이념-노선을 조율하지 않을 수 없고, 이를 거부하면 고립된다.
반면에 영미식 양당 정치에서는 극우파가 단숨에 양대 정당 중 한 쪽(미국 공화당)을 장악하고 집권까지 하는 일이 벌어지며, 양대 정당 중 한 쪽(영국 보수당)이 쇠퇴하면 극우파가 삽시간에 양대 정당 중 하나의 지위를 확보하기도 한다. 정당 질서를 통해 극우파의 '쿠데타'(국가 권력의 핵심을 일거에 장악한다는 의미에서)가 제도적으로 보장되는 것이다.
지난 일요일(8일)에 실시된 일본 중의원 총선에서도 같은 논리가 작동했다.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가 이끄는 자유민주당의 대승은 물론 일본 사회 자체의 우경화를 반영한다. 그러나 압승의 그 규모는 분명히 소선거구제가 중심이 되는 1990년대 이후 일본 정치 체제에 힘입은 것이다. 정당투표에서 자유민주당이 받은 지지는 36.72%이고, 지역구 선거에서 받은 표도 절반에는 미치지 못하지만(49.23%), 의석은 3분의 2 이상(67.95%)을 차지했다. 승자독식 선거제도가 아니었다면, 다카이치 사나에의 극우 '바람'이 '태풍'까지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아니, 실은 남의 이야기나 할 때가 아니다. 승자독식 선거제도에 바탕을 둔 양당 정치에서 극우파가 눈 깜짝할 새에 대의정치의 절반을 차지한 첫 번째 나라는 미국도 아니고, 영국도 아니다. 12.3 내란 이후 양대 정당 중 하나인 '국민의힘'이 극우 정당이 돼버린 대한민국이다.
다행히 시민의 힘으로 내란을 진압해 극우 정당을 야당으로 주저앉혔다지만, 이 당이 제1야당인 정치 지형을 최소한 2년 넘게 감수해야 한다. 게다가 2년여 뒤에 더 나은 어떤 질서를 세워야 할지는 아직 감도 잡지 못한 형편이며, 양당 정치 특유의 시계추 운동에 따라 극우 정당이 차기 권력에 다가가는 지옥도가 펼쳐질 가능성 또한 없지 않다.
대한민국 시민들이 미합중국 시민들보다 먼저 극우파 내란을 진압했다는 자긍심에 취해 있을 수만은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대의제도 전반을 손보고 정당 질서를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는 한, 내란은 어쩌면 1막이 끝난 데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런 위험을 피하기 위해 지금 당장 무엇부터 손대야 할지 막막하기는 하지만, 이제 한 가지 분명해진 점은 있다. 그것은, 지난 80여 년간 한국 정치를 지배해온 영미식 '민주주의'의 교과서에서 하루빨리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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