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에게 맡긴 유물
오구라 다케노스케는 대구 저택에 숨겨놓은 유물들 이외에 다시 조선에 돌아올 경우를 대비해 친분이 있었던 조선인에게 유물의 일부를 맡기고 대구를 떠났다고 한다. 최창섭이라는 사람인데, 은행원 일을 하다가 해방 후에 대구에서 과수원을 하고 있었다. 오구라 다케노스케는 최창섭에게 "10년 후 다시 올테니 잘 보관해 주시게"라는 취지로 말하면서 약 200여 점의 유물을 맡겼다고 한다.
최창섭은 유물들을 과수원에서 보관을 하다가 1949년부터 유물들을 팔았다. 일본인의 골동품 가게를 인수하여 운영하던 홍기대라는 자가 1949년 즈음에 최창섭의 과수원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신라시대 금동 불상 7점, 고려자기 등 자기류 수십 점, 각종 고려·조선 시대 접시 670여 점, 낙랑 구리 거울 약 10점, 각종 서화류 수십 점, 귀면 토기류 다수, 고려·조선 시대 유명인 각종 도장 다수와 같은 유물들을 확인했다고 한다.
이후 홍기대는 1954년에 다시 최창섭을 찾아갔지만, 여러 유물들이 이미 팔렸고 몇몇 유물들은 보관 상태가 좋지 않은 것도 있었다. 홍기대는 직접 또는 친구를 통해 최창섭이 소장하고 있었던 오구라 다케노스케의 고려청자와 분청사기 등 50~60점을 사들였다고 한다.
대구부(大邱府)에 기증한 유물
한편 오구라 다케노스케는 대구부에 유물들을 기증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당시 대구 지역에는 오구라 다케노스케를 비롯하여, 이치다 지로, 스기하라 초타로(杉原長太郎)를 비롯하여 50~60명이 넘는 유물 수집가들이 있었다. 해방 전 대구여자보통학교 교장이었던 시라카미 주키치(白神壽吉)가 회갑을 맞이하자 이를 기념하여 대구고미술전(大邱古美術展)을 개최하기도 했는데, 이들 중 유물을 출품한 자들이 47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해방 이후 이들은 1946년 1월까지 수집해 온 유물들을 목록과 함께 대구부에 헌납해야 했다. 이들이 대구부에 헌납한 유물은 선사 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 아우르는 불상, 토기, 조각, 도자기, 서화 등 2,000점을 훨씬 넘었다고 한다. 이 많은 유물들은 오구라 다케노스케의 저택 창고에 임시로 보관되었는데, 과수원 지주였던 사카마키 키쿠노조(酒卷菊之丞)의 목록만 남아있고 그 외는 분실되어 현재 파악할 수가 없다.
이때 오구라 다케노스케는 700~800점의 유물을 대구부에 기증했다. 이는 스기하라 초타로가 기증한 유물들과 함께 일본인들의 대구부 기증 유물 중 70% 이상을 차지할 만큼 많은 수였다. 이 유물들은 그 가치가 상당한 것들이었다고 하는데, 그 목록도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그가 어떠한 유물들을 기증했는지 이를 모두 명확하게 파악할 수가 없다.
이후 오구라 다케노스케가 기증한 유물을 포함한 2,000여 점이 넘는 유물들은 한국 전쟁을 거치면서 도난이나 분실이 발생했고, 이후 대구시(1949년에 대구부→대구시)가 1957년 2월에 경북대학교에 1,312점의 목록과 유물들을 넘겼다.
미군에 압수당한 유물
오구라 다케노스케를 포함한 대구 거주 일본인들은 대구부에 유물을 기증하기도 했지만, 모든 유물을 기증한 것은 아니었다. 유물 일부를 일본으로 귀국할 때 밀항선 등을 통해 반출하기도 했고, 미군에게 적발되어 압수되기도 했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오구라 다케노스케는 대구 저택에 유물들을 숨기거나 지인에게 맡기기도 하고 대구부에 기증하기도 했는데, 다른 일부는 반출을 시도하다가 적발되어 압수되기도 했다. 아래의 신문 기사와 중앙박물관(국립중앙박물관의 전신)이 발간한 <관보>를 통해 이를 살펴보자. 먼저 1945년 12월 27일에 발간된 <동아일보>를 보면 아래와 같은 기사가 실려있다.
이에 대해서 최승만 종교예술과장은 다음과 같이 말하여 일반의 협력을 구했다.
그동안 조선에서 가지고 간 고문화재는 수천 점에 달하는데 주로 일본 궁내성(宮内省) 도서로 동양문고(東洋文庫), 동경제대(東京帝大) 도서관 등 공공단체를 필두로 교토(京都), 야마구치(山口)에 있는 개인 장서가 골동품상들의 손에 흩어져 있다고 한다. 8·15 이후의 혼란한 틈을 타서 남선전기(南電) 사장 오구라 다케노스케(小倉武之助), 대구의 이치다 지로(市田次郞) 등은 일찍부터 수집했던 귀중품과 미술품을 재빨리 가져가려던 것을 도로 찾아 방금 경주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왜구들은 임진왜란을 계기로 진귀한 도서, 불상 등 문화재를 도적질 해 갔고, 이즈음 와서는 더욱 합법적으로 자원뿐만 아니라 조선의 얼을 빼았기에 온갓 힘을 다 썼다.
이 기사를 보면 종교예술과장이었던 최승만은 일본이 조선에서 문화재를 반출한 행위를 비판하고 있으며, 오구라 다케노스케와 이치다 지로가 유물을 일본으로 반출하려다가 실패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때 오구라 다케노스케와 이치다 지로가 유물을 일본으로 '재빨리 가져가려'고 했지만 실패했고, 일부 유물들은 압수되어 1945년 12월 즈음에는 경주박물관에 보관되고 있었다.
이 신문 기사에는 오구라 다케노스케가 반출하려고 했던 유물의 수량이 나와있지 않지만, 중앙박물관의 <관보>에서는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관보>에는 '경주분관 적산 미술품 접수'라는 제목으로 당시 미군이 접수한 미술품 관련 내용이 실려있는데, 미군은 오구라 다케노스케(小倉武之助)의 670점을 비롯하여 이치다 지로(市田次郞)의 325점, 가시이 겐타로(香椎源太郞)의 1,628점 총 2,623점을 경주박물관에 전달했다.
적산 미술품의 적산(敵産)이란 '적의 재산', 즉 해방 이전까지 조선에 거주했었던 일본인들의 재산을 의미하는데, 적산 미술품은 그들이 소유하고 있었던 미술품이다. 오구라 다케노스케는 도자기와 금속품, 서화 등 670점을 일본으로 불법 반출하려고 했지만 미군이 이를 적산 미술품으로 접수한 것이다. 미군이 압수한 반출 시도 유물 중 25%를 차지하는 많은 양이라고 볼 수 있다.
일본으로 가져간 유물
오구라 다케노스케는 위와 같이 해방 이후 670점의 유물들을 미군에 압수당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많은 유물들을 일본으로 반출하는 데에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하여 "전기회사 직원이 화물차 2대 분량의 골동품을 전부 포장하여 묶어 부산까지 가서 연락선에 실어주고 왔다"는 증언이 있다.
이와 함께 남선합동전기회사에서 근무했던 조용하 라는 자의 증언이 있다. 위 증언의 전기회사 직원'으로 보이는데, 그는 해방 이전에도 오구라 다케노스케가 그를 대구 저택에 자주 불러 유물을 포장하거나 지하실을 정리했다고 하며, 해방 당일부터 트럭 일곱 대 분에 해당하는 유물을 포장한 후 "부산까지 따라가서 기선에 실어주고 오구라와 이별한 뒤 대구에 돌아왔다"고 증언했다. 오구라 다케노스케가 어떠한 유물들을 일본으로 반출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화물차 두 대, 또는 트럭 일곱 대 분량이라면 상당히 많은 유물들을 일본으로 가져갔다고 추정할 수 있다.
오구라 다케노스케는 일본으로 귀국한 후 1958년에 '오구라 컬렉션 보존회'을 설립하고 1964년에 '오구라 컬렉션 목록' 작성을 작성하여 일제강점기 당시 반출했던 유물들과 패전 이후 불법 반출한 유물들을 관리했다. 1964년에 그가 사망한 후에는 그의 아들 오구라 야스유키(小倉安之)가 이를 운영하다가 1981년에 도쿄국립박물관에 기증했다. 해당 유물은 총 1,110점으로 이중 한국 관계 유물은 1,030점이다. 현재 도쿄국립박물관은 '오구라 컬렉션 보존회 기증'이라는 짧은 이름을 달아 오구라 다케노스케의 불법 반출 유물을 동양관(東洋館)에서 전시하고 있다(칼럼 2부 ⑤ 참조).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오구라 다케노스케는 조선에서 수많은 유물들을 손에 넣었다. 그 수는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 패전 이후 유물의 일부는 한국에 남았고, 또 다른 일부는 일본으로 불법 반출되었다. 대구 저택에 숨겨놨던 유물 140여 점(칼럼 2부 ⑪ 참조), 지인에게 맡긴 유물 200여 점, 대구부에 기증한 유물 700~800여 점, 미군에게 압수당한 유물 670점만 해도 1,900여 점이나 된다.
현재 도쿄국립박물관이 관리하고 있는 '오구라 컬렉션' 1,030점을 포함하면 3,000여 점에 육박한다. 이 외에 오구라 다케노스케는 일본 귀국 후 생계를 위해 유물들을 매매했다고 하는데, 그 대상이 얼마나 되는지는 파악할 수 없다고 하는데, 이와 같은 유물들까지 포함한다면 그가 얼마나 많은 유물들을 소유하고 있었는지 가늠하기 조차 힘들다.
그렇다면 해방 이후 한국은 오구라 다케노스케의 불법 반출 유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1951년 10월 말부터 개최된 한일국교정상화 회담(칼럼 1부 ③~⑨ 참조)에서 한국 측은 오구라 다케노스케의 반출 유물을 반환하라고 일본 측에 주장한다. 다음 화에서는 동 회담의 문화재 반환 교섭에서 한일 양국이 오구라 컬렉션을 어떻게 논의했는지, 한국 측은 오구라 컬렉션을 돌려받을 수 있었는지 등 그 교섭 과정을 살펴보기로 한다.
■ 참고문헌
경상북도·(사) 한국국외문화재연구원, <구한말·일제강점기 경상도지역의 문화재 수난일지>, 2018.
사단법인 우리문화재찾기운동본부·경상북도, <잊을 수 없는 그때 - 不忘의 時間>, 2013.
李慶熙, '오쿠라(小倉)컬렉션의 行方', <(월간) 조선> 27권 5호, 2006년 6월.
이영섭, '문화재계 비화 (3) 내가 걸어온 고미술계 30년', <월간 문화재> 3월호, 1973.
이영섭, '문화재계 비화 ④ 내가 걸어온 고미술계 30년', <월간 문화재> 4월호, 1973.
정규홍, <유랑의 문화재>, 학연문화사, 2009.
한국박물관 100년사 편찬위원회, <한국박물관 100년사-자료편>, 국립중앙박물관,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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