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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히로부미가 가져간 도자기, 결국 한국의 품으로 다시 돌아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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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히로부미가 가져간 도자기, 결국 한국의 품으로 다시 돌아와

[일본은 왜 문화재를 반환하지 않는가?] 번외편 ⑦ 한일회담에서 돌려받은 문화재는 무엇이 있었을까?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한일회담에서 한국 측은 일제강점기 당시 불법으로 반출된 문화재를 반환받기 위해 문화재 반환 문제를 제기했다. 한일 양국은 제1차 회담부터 제3차 회담은 청구권위원회에서, 제4차 회담부터는 문화재소위원회와 전문가회의 등에서 이 문제를 둘러싼 열띤 공방전을 펼쳤다. 결국 제7차 회담에서 문화재 협정을 체결(합의의사록과 부속서 포함)하면서 약 14년에 걸친 문화재 반환 교섭이 타결되었고, 이후 일본정부가 1966년 5월에 1432점의 문화재를 한국정부에 인도했다.

▲ 인도 문화재에 대한 기자들의 질의에 답변하고 있는 한국 전문가들(1966년). ⓒ 국가기록원

문화재 협정을 통해 인도받은 문화재는 무엇이 있었을까? 이번 편과 다음 편에 걸쳐 한국정부가 인도받은 주요 문화재는 어떠한 것이 있었는지, 그리고 인도받지 못한 문화재는 무엇이 있었는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문화재 협정과 1,432점의 문화재 인도

한일회담 당시 한국 측은 '제1차 반환청구 한국문화재 항목', '문화재 반환의 7항목', '반환청구 한국문화재 목록' 등 여러 차례 문화재 목록을 제시했다(칼럼 제1부 ⑤, ⑥, ⑦ 참조). 일본 측이 문화재 반환 교섭에서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자 '반환'과 '기증'이라는 추상적인 문제를 논의하기 보다 어떠한 문화재를 돌려받을 것인가라는 실질적인 문제를 논의하여 일본 측을 교섭에 끌어들이는 것이 주요 목적이었다.

한국 측은 문화재 목록들을 정리하면서 제6차 회담에서 '반환청구 한국문화재 목록'(1962년 2월 28일)을 최종본으로 제출했다. 반환 기준 시기는 을사늑약이 체결된 1905년부터이며(칼럼 번외편 ② 참조), 고고미술품 3,186점(국유 1,272점/사유 1,914점), 전적(典籍, 고서적) 1,015점, 체신 관계 문화재 278점 총 4,479점이 그 대상이었다.

한일 양국은 문화재소위원회와 전문가회의를 중심으로 '반환청구 한국문화재 목록'을 논의했다. 일본 측에서도 내부적으로 외무성과 문화재보호위원회가 어떤 문화재를 한국에 기증할지 논의하고, 제7차 회담에서 고고자료 291점, 전적 163부 852책, 도자기 72점, 석조미술품 3점, 체신 관계 문화재 35점을 인도 품목으로 제시했다.

▲ 일본정부가 인도할 문화재 품목이 적힌 '부속서'. ⓒ 한일회담 관련 한국외교문서

제7차 회담에서 한일 양국은 일본 측의 인도 품목안을 철야 교섭한 끝에 6월 18일 새벽에 인도 품목을 최종적으로 확정했다. 이후 6월 22일에 문화재 협정이 체결되었고, 약 1년 후 일본정부가 부속서에 포함된 1,432점의 문화재를 한국정부에 인도했다(칼럼 제1부 ⑨ 참조). 여기에는 제4차 회담 개최 직후 인도받은 106점의 문화재를 포함하여 고고자료 334점, 도자기 97점, 석조미술품 3점, 도서 852점, 체신 관계 품목 36점이 있었다.

돌아온 문화재 ① 이토 히로부미의 고려자기

첫째, '이토 히로부미의 고려자기'이다. 그는 한국에서 '조선 침략의 원흉'으로 잘 알려졌지만, 그가 당시 일본인들 사이에서 일어났던 '고려청자광'(高麗靑瓷狂), 즉 '고려자기 붐'을 일으킨 '고려자기 컬렉터' 또는 '고려자기 장물아비'라는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가 초대 통감으로 조선에 와서 수많은 고려자기를 손에 넣었고, 일본으로 돌아갈 때 '오미야게'(선물)로 고려자기를 가져가기도 했다고 한다(칼럼 제2부 ① 참조).

▲ '청자귀형주자', '청자음각모란문과형주전자', '청자상감국모란문장경각병', '청자음각련화절모문장경병'. ⓒ한일협정 반환 문화재 자료집

이토 히로부미의 고려자기는 한일회담 당시 한국 측이 반환을 요구한 주요 문화재 중 하나였으며, 이에 대한 논의가 여러 차례 있었다. 일본 측은 제7차 회담에서 도쿄국립박물관이 소장하고 있었던 72점의 도자기를 인도 품목으로 제시했다. 한국 측은 더 많은 수량을 요구했고, 최종적으로 일본 측이 97점을 인도하기로 합의했다.

이 도자기들은 이토 히로부미가 당시 메이지 덴노(明治天皇)에게 진상한 것이고, 도쿄국립박물관의 전신인 도쿄제실박물관이 보관하고 있던 것들이다. 이때 돌려받은 고려자기 중에는 보물 452호로 지정되었던 '청자귀형주자'(靑磁龜形主子)를 비롯하여 '청자음각모란문과형주전자'(靑磁陰刻牡丹文瓜形注子), '청자상감국모란문장경각병'(靑磁象嵌菊牡丹文長頸角甁), '청자음각련화절모문장경병'(靑磁陰刻蓮花折丹文長頸甁) 등이 있었다(칼럼 제2부 ③ 참조).

돌아온 문화재 ② 경주 노서리 215번지 고분 출토품

둘째, '경주 노서리 215번지 고분 출토품'이다. 이 고분은 현재 경주시 노서동 고분군에 속한 것 중 하나이다. 1933년 4월에 봉분이 사라진 고분 근처에서 조선인이 일을 하다가 우연히 금귀고리 1점 등을 발견하여 경찰에 신고했고, 이후 조선총독부의 조선고적연구회에서 활동하던 아리미쓰 쿄이치(有光敎一)가 고분을 조사하여 금귀고리 1점, 곡옥 등 나머지 유물들을 찾아냈다. 이후 금귀고리, 금팔찌, 금목걸이, 토기, 반지, 곡옥 등 고분의 출토품은 각각 조선총독부 박물관과 도쿄제실박물관으로 옮겨졌다.

▲ 경주 노서리 215번지 고분 출토품 중 금귀고리, 금목걸이, 금팔찌. ⓒ 국립중앙박물관 홈페이지

경주 노서리 215번지 고분 출토품은 '반환청구 한국문화재 목록' 중 '제1항 조선총독부에 의해 반출된 것' 중 ②에 해당했고, 한국 측은 이에 대한 반환을 요구했다. 일본 내부에서도 외무성과 문화재보호위원회가 이 고분의 출토품을 논의했는데, 양측 모두 기본적으로 이는 넘겨주지 않는 방안을 생각하고 있었고, 문화재보호위원회는 경우에 따라 이를 추가해도 좋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제7차 회담에서 일본 측이 제시한 인도 품목에 이 고분의 출토품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지만, 한국 측은 일본 측이 인도 품목에서 제외한 양산부부총 출토 유물을 더 이상 요청하지 않는 대신에 노서리 215번지 고분 출토품과 '경주 황오리 16호분 출토품'을 요구했고, 6월 18일 철야 교섭 끝에 이를 돌려받기로 했다. 1966년 5월에 문화재를 인도받을 때 노서리 215번지 고분 출토품은 11점이 돌아왔으며, 그중 금팔찌, 금귀고리, 금목걸이는 각각 보물 454호, 455호, 456호로 지정되었다.

돌아온 문화재 ③ 강릉 한송사지 석조보살 좌상

셋째, '강릉 한송사지 석조보살좌상'이다. 강릉시 남항진동의 한송사지에서 출토된 고려시대의 불상으로, 10세기 즈음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에서 불상은 화강암으로 제작되는 경우가 일반적인데, 이 불상은 대리석으로 제작된 점이 큰 특징이다. 높이 92.4cm에, 머리와 몸통 부분을 접합한 흔적이 있으며 이마 부분의 백호(白毫)가 없는 것을 제외하면 상당히 양호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강릉시립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한송사지 석조보살좌상'(보물 제81호)과 함께 본존불 좌우에 위치하고 있던 한 쌍으로 추정되고 있다. 조선총독부 관측소 소장이었던 와다 유지(和田雄治)가 강릉에 왔을 때 이 불상을 가져가 1911년에 일본으로 반출했고, 1912년에 도쿄제실박물관에 기증했다.

▲ 한송사지 석조보살좌상. ⓒ 국립춘천박물관 홈페이지

이 불상은 한일회담 당시 한국 측이 반환을 요구했던 석조미술품 중에 하나였다. '반환청구 한국문화재 목록'에는 '다라보살상 대리석'(多羅菩薩像 大理石)으로, 부속서에는 '석조다라보살상<석조보살좌상>'(石造多羅菩薩像<石造菩薩坐像>)으로 표기되어 있었다. 제7차 회담의 문화재 반환 교섭에서 한국 측이 이 불상의 반출 경위를 문의한 적이 있으며, 일본 측에서도 문화재보호위원회가 이를 한국 측에 인도해도 되는 것으로 외무성에 설명하기도 했다.

이 불상은 한국에서 '한송사지 석조보살좌상'으로 불리고 있으며, 1966년 5월에 인도된 후 1967년 6월에 국보 제124호로 지정되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가 2002년 국립춘천박물관 개관과 함께 이곳으로 이전되었다.

한편 한송사지 석조보살좌상을 춘천에서 강릉으로 가져오기 위한 움직임이 있었다. 2021년 5월 신재걸 시의원이 강릉시의회에서 '한송사지 석조보살좌상의 강릉 제자리 찾기 운동 제안'을, 2024년 11월 김홍수 시의원이 '지역 문화유산의 재조명 및 활성화 방안'을, 2022년 2월에 위호진 도의원이 강원도의회에서 '국보 제124호 한송사지 석조보살좌상 제자리찾기 건의안'을 발표했다.

■ 참고문헌

한일회담 관련 한국정부 외교문서 및 일본정부 외교문서

김윤이, ‘한송사지 석조보살좌상의 근·현대기 존명 변화 과정과 그 의미’, <미술사학연구> 제312호, 2021.

문화재청, <한·일협정 반환문화재 자료집>, 2005.

국립중앙박물관 홈페이지

국립춘천박물관 홈페이지

엄태봉 강원대학교 교수

엄태봉 교수는 문화재 반환 문제, 강제동원문제, 교과서 문제 등 한일 간의 역사인식문제를 연구하고 있는 한일 관계 전문가다. 역사인식문제를 대중들에게 널리 알리고 올바른 역사인식을 확산하기 위해 활동하고 있다. 주요 연구로 <한일 문화재 반환 문제는 왜 해결되지 못했는가?>, <교과서 문제는 왜 연속적으로 발생하고 있는가?>, <일본 '영토·주권 전시관'의 영토 문제 관련 홍보·전시에 대한 연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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