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봄, 영국에서 『반헌법행위자열전』 2권을 펼쳤다. 김기홍(金淇洪, 1928~) 항목 말미의 결론문장이 눈에 박혔다.
"정적에 대한 무기징역 구형, 공안조작사건에서의 사형판결, 문화예술에 대한 검열, 납북귀환어부에 대한 간첩조작 판결, 언론탄압 판결 등 전방위에 걸쳐 반헌법행위를 자행했다."
전방위. 빠진 것이 없다. 정치인을 잡고, 경제학자를 죽이고, 영화를 음란물로 만들고, 어부를 간첩으로 만들고, 기자를 해고시키고, 선교사를 추방했다. 한 사람이 이 모든 일에 손을 댔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대법원판사가 됐다.
영국에서 이 인물을 들여다보면 한 가지 구조가 뚜렷이 보인다. 권력은 '사냥개'가 필요하다. 그리고 '사냥개'는 권력이 가리키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간다. 김기홍은 그 달리기를 40년 가까이 멈추지 않았다.
1928년 경남 삼천포 출생, 검사에서 판사로
김기홍은 1928년 5월 30일 경남 삼천포에서 태어났다. 1951년 동아대 법정대를 졸업하고 같은 해 12월 제2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했다. 고시 동기로는 이태영 변호사, 허형구 전 검찰총장이 있다. 이 기수에서도 『반헌법행위자열전』에 이름을 올린 사람이 여럿이다. 한 시대가 사람을 만들기도 하고, 사람이 한 시대의 성격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는 부산지검 진주지청 검사로 경력을 시작했다. 그런데 1957년 서울지검 검사 시절에 이미 문제적 장면이 연출됐다. 인권침해 신고를 당하고도 오히려 피해자 쪽을 계속 기소하고, 증거가 없는 강간치사 사건에서 "임신하면 과학적 입증이 될 것"이라는 황당한 논리로 항소하는 등 검찰권을 무리하게 행사했다. 5·16 쿠데타 이전에도 권력의 의지가 법 위에 올라서는 장면이 이미 그의 이력 안에 있었다.
세계사 속의 동류, '다재다능한 부역자'들
영국에서 이 장면을 들여다보면 비슷한 유형의 인물이 떠오른다. 소련의 안드레이 비신스키(1883~1954)다. 스탈린(1878~1953) 치하에서 대숙청 재판을 지휘하고, 노동법 분야 학술서도 쓰고, 나중에는 유엔 소련대표까지 된 인물이다. 검사로, 학자로, 외교관으로 권력에 복무하며 '다재다능한 부역자'의 전형을 보여줬다.
나치 독일의 한스 프랑크(Hans Frank, 1900~1946)도 있다. 히틀러(1889~1945)의 법률자문에서 시작해 점령지 폴란드 총독까지 오른 그는 법률가로서 나치즘에 법적외양을 입히는 작업을 했다.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사형이 선고됐다. 김기홍의 역할은 이들보다 작았다. 그러나 구조는 똑같다. 법률전문가가 권력의 의지를 법적으로 번역하는 것.
5·16 쿠데타 부역자, 장면에게 무기징역을 구형하다
김기홍 이력의 첫 번째 결정적 장면은 1961년 5·16 쿠데타 직후다. 병역문제로 검사직을 유지하는 조건으로 군 법무관이 된 그는 중앙고등군법회의 검찰관으로 이른바 '이주당 사건'을 맡았다. 이 사건은 중앙정보부가 민주당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조작한 '반혁명 음모사건'이었다.
1962년 8월, 검찰관 김기홍은 전직 국무총리 장면(1899~1966)에게 무기징역을 구형하고 법정 구속했다. 장면 정권 아래에서 민주주의를 짓밟으며 쿠데타를 일으킨 세력이 자신들이 짓밟은 민주정권의 수반을 반혁명 죄로 구형한 것이다. 역사의 아이러니이자 법의 오용이었다.
책은 이렇게 기록한다. 그 후 김기홍이 판사로 전관한 것은 "더 이상 이런 일에 동원되기 싫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젊은 시절의 김기홍에게는 비록 군사정권에 부역하긴 했지만, 최소한의 양심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얄팍한 양심"은 오래가지 못했다.
1969년 권재혁 사형, 경제학자를 죽인 판결
판사가 된 김기홍이 내린 가장 치명적인 판결은 1969년 남조선해방전략당 사건이다. 중앙정보부가 고문으로 조작한 이 사건에서 재판장 김기홍은 경제학자 권재혁과 이일재에게 사형을, 이강복과 이형락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권재혁은 법정에서 호소했다.
"남조선해방전략당이라는 명칭을 중앙정보부에 와서 처음 들었다. 공포 분위기와 압박감 때문에 사실대로 말할 수가 없었다."
피고인 11명 전원이 검찰조서의 임의성을 부인했다. 그러나 김기홍은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1969년 11월 4일 권재혁의 사형이 집행됐다.
2009년 진실화해위원회는 이 사건이 중앙정보부의 고문에 의한 조작임을 결정했다. 2014년 대법원은 재심에서 권재혁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45년 만이었다. 재판부는 "강압과 구타에 못 이긴 자백의 증거능력을 인정한 원심은 법리를 오해한 위법이 있다"고 판시했다. 하지만 권재혁은 이미 44년 전에 죽어 있었다.
영화를 음란물로 만들고, 어부를 간첩으로 만들고, 선교사를 추방하고
김기홍의 반헌법 행위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1969년 그는 반공검열을 비판한 유현목 감독의 영화 〈춘몽〉 항소심에서 "예술성과 음란성은 양립한다. 나체장면은 성적수치심을 일으키므로 음화"라고 판시해 유죄를 선고했다. 국시인 반공을 건드린 것이 불편했는데, 외설이라는 다른 죄목으로 처벌한 것이다. 영화계는 큰 충격에 빠졌다.
1971년에는 납북어부 김익순 등에 대한 간첩조작사건 항소심 재판장으로 유죄를 선고했다. 이 사건은 2014년 재심에서 무죄가 선고됐다. 책은 "김기홍은 납북어부에 대한 2차 처벌인 간첩 조작의 지옥문을 여는 데 큰 역할을 한 법관"이라고 기록한다.
1975년에는 인혁당재건위 사건이 조작임을 최초로 폭로한 미국 선교사 조지 오글(George Ogle, 1929~2019) 목사가 박정희 정권에 의해 강제 추방된 후 제기한 행정처분 취소 청구소송을 기각했다. 민주화운동을 지원한 선교사의 복귀 길을 법원이 막은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오글 목사는 2020년 6월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한국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국민포장을 수여받았다.
대법원판사로, 김대중 사형 확정 판결에 이름을 올리다
1980년 5월 박정희 사후, 최규하(1919~2006) 대통령에 의해 대법원판사에 발탁됐다. 그리고 1981년 1월 23일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김대중(1924~2009) 내란음모사건 상고를 기각하고 사형을 확정했다. 이 판결에 참여한 13인의 대법원판사 명단에 김기홍의 이름이 있다. 한 시간 뒤 전두환(1931~2021)이 사형을 무기징역으로 감형했다. "악역은 대법원이 맡고 선심은 전두환이 쓴 꼴"이었다는 평가가 당시에 나왔다.
그는 전두환 정권이 출범하면서 11개월 만에 대법원판사직에서 물러났다. 새 정권은 새 사냥개가 필요했던 것이다.
영국에서 2026년을 생각한다
비신스키는 소련 붕괴 후 러시아에서도 역사의 죄인으로 기록됐다. 한스 프랑크는 뉘른베르크에서 사형을 받았다. 김기홍은 1985년까지 교원공제회 법률고문으로 활동했고 그의 사망 연도조차 공식적으로 기록되지 않은 채 이름만 남아 있다. 적어도 처벌도, 사과도 없이.
2024년 12월 3일 윤석열(1960~)의 비상계엄 선포를 영국에서 생중계로 보며 나는 장면에게 무기징역을 구형하던 군검찰관 김기홍을 떠올렸다. 쿠데타 세력의 논리로 민주정권의 총리를 법정에 세우는 것, 그 문법이 60년을 건너 귀환했다. 『반헌법행위자열전』은 김기홍의 이름을 기록했다. 경제학자를 죽이고, 선교사를 추방하고, 기자를 해고시키고, 대통령의 사형을 확정한 판사의 이름을.
역사의 법정에는 공소시효가 없다. 그리고 그 법정의 방청석에는 우리가 앉아 있다.
참고문헌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원회, 2026, 『반헌법행위자열전 1-4』, 사회평론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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