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정세가 요동치고 있다. 지난 8월 16일, 미국 대통령 트럼프의 한마디로 한미연합훈련이 하루 전날 대폭 축소되었다. 며칠 뒤 트럼프는 백악관 기자회견에서 김정은과 친분을 과시하며, 조선(이 글에서는 북한이 아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공식 약칭인 조선을 사용했다)에 핵무기 57개가 있다고 해 조선의 핵무기 보유를 용인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한국 정부도 다급하게 입장을 내놓았다. 한미연합훈련 축소를 계기 삼아 조선과 대화의 계기를 마련하자고 말하지만, 실상은 트럼프의 일방적 행동을 예상하지 못해 당혹스러워하는 반응이었다. 국민의힘은 한미동맹에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니냐며 이재명 정부를 규탄하고, 강력한 안보를 위해 한국도 핵무장을 논의해야 한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한국의 여론이 한바탕 난리가 나자, 미국은 '조선 비핵화' 정책은 변함이 없다고 답했다. 그제야 열흘 간의 소동은 일단락되는 듯하다. 하지만 한국 사회의 불안은 여전하고, '한반도 비핵화' 정책의 균열은 분명해졌다. 무엇보다 한반도 평화를 도모하기 위한 구상과 시도가 사라져가고 있다.
핵확산금지조약(NPT) 체제의 실패
한반도 비핵화 정책의 균열은 전 세계의 핵무기 확산을 억제 하던 핵확산금지조약(NPT) 체제의 한계이기도 하다. 1968년 유엔에서 채택된 NPT는 냉전 구도의 심화 속에서 핵무기 보유국이 늘어날 우려가 증가하자, 전 세계에서 핵무기 보유 국가를 미국, 영국, 프랑스, 중국, 소련(현 러시아)으로 제한하겠다는 결정을 핵심으로 하는 국제 조약이다. NPT에 가입하면 핵무기 비보유국은 핵에너지의 사용만으로도 국제원자력기구의 사찰과 규제를 받지만, 핵무기 보유국은 자발적인 핵무기 감축을 요구받을 뿐이기에 불평등 조약이라는 비판이 채택 당시부터 있었다. 그럼에도 핵전쟁 위기가 고조되는 중에 더이상의 핵무기 확산은 막아야 한다는 현실적인 선택지로 여겨지며 핵무기 보유국 중심의 핵 통제를 용인하는 NPT 체제가 출발할 수 있었다.
하지만 냉전의 두 축이었던 미국과 소련이 NPT 체제 아래 핵무기 확산을 막는 방식은 오히려 핵무기 위협을 더욱 끌어올리는 것이었다. 미국과 소련은 동맹국의 핵무기 개발을 억제한 대신, 핵우산을 씌워주겠다는 약속으로 동맹국의 안보 우려를 해소했다. 유럽에서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바르샤바조약기구를 통해, 동아시아에서는 조-소, 한-미, 미-일 동맹으로 핵우산 제공을 통한 확장억제전략이 펼쳐지면서, 세계는 핵전쟁의 작전영역에 들어갔다. 핵무기 보유국은 늘지 않았지만 세계 곳곳에 미국과 소련의 핵우산이 펼쳐진 것이다.
소련의 붕괴로 냉전은 끝났지만, 핵무기 보유 5개국은 핵무기 감축이 아니라, NPT 체제를 더욱 강화했다. 냉전기 핵전쟁의 위협은 핵보유국들로부터 나왔지만, 탈냉전기 NPT 체제에서는 핵무기 개발을 시도하는 '불량국가'로부터 비롯된다는 명분이었다. 특히 미국은 자신들이 제압하려는 국가들을 압박하거나 침략하기 위해 '핵무기 개발'을 내세웠다. 2003년 '대량살상무기 개발'이라는 거짓정보를 퍼뜨리며 이라크를 침공했다. 이란, 조선에 대해서도 핵무기 개발을 이유로 오랜 기간 경제봉쇄를 이어왔다. 올해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란 침공도 핵무기 개발이 명분이었다.
미국은 핵 비확산을 명분 삼아 자신들의 안보이익을 위해 전쟁을 일으키고, 군사적 긴장을 고조시켜왔다. 이는 역설적으로 미국과 적대해온 국가들이 생존을 위한 선택지로서 핵무기 개발에 매달리는 결과를 낳았다. 미국의 침략 위협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 생존을 위해 핵무기를 개발해야 할 동기가 강해졌다. 미국에 재래식 전력으로 맞서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이란이 핵무기 개발을 반복하여 시도하고, 조선이 강력한 경제 제재 아래에서도 끈질기게 핵무기를 개발한 배경이기도 하다.
NPT 체제는 힘을 잃고 있다. 핵 비확산을 명분으로 한 전쟁이 반복됐지만, 결국엔 핵무기 개발을 막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패권국으로서 국제질서를 만들고 유지해온 미국은 과도한 부담을 이유로 이제 그 역할을 벗어던지려 하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국제질서로서 NPT 체제의 강화보다는 개별 국가들과 '거래', '미국 우선주의'에 기반한 핵안보 정책으로 이동하고 있다. 이스라엘-미국의 이란 침공으로 중동 전체의 군사적 긴장도가 커지자, 미국은 사우디아라비아의 핵농축을 허용했다. 급기야 미국 대통령이 조선을 핵무기 보유국으로 언급하며 핵무기 개수까지 말하는 상황이 되었다.
핵우산 아래에서 평화를 도모할 수 있을까
NPT 체제의 실패를 가장 크게 체감하는 곳이 바로 한반도다. 미국은 조선의 핵무장을 인정하는 듯한 발언을 이어가며 한국과 일본을 향해서는 각자의 안보는 스스로 해결하라고 주문하고 있다. 이에 일본과 한국에서 핵무기를 보유하자는 주장이 힘을 얻는 중이다. 핵무기 배치 가능성을 따지기 전에 필요한 것은 한반도 평화를 위한 한국의 전략이 무엇이어야 하는지 묻는 것이다.
그동안 한국 정부가 한반도 평화를 모색하겠다고 내놓은 유일한 방법은 '한반도 비핵화'였다. 한국과 조선 모두 핵무기를 금지하자는 제안은 평화적이고 중립적인 해법인 것처럼 여겨져 왔다. 하지만 실상은 그 반대다. 1991년 한국과 조선의 '한반도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이 발표되기 직전까지 주한미군은 조선을 겨냥한 전술핵 수백 개를 배치했다. 이런 위협이 조선의 핵무기 개발을 자극하자, 미국은 급하게 전술핵을 철수하고 '한반도 비핵화 선언'을 주선했다. 하지만 전술핵만 철수했을 뿐, 주한미군은 여전히 한국 땅에 주둔하며 한미연합훈련을 수시로 이어갔다. 한국은 여전히 미국의 핵우산 아래 놓여있었다. 한반도 비핵화 구상은 평화를 위한 구상이기보다는 처음부터 조선의 비핵화만을 전제하는 일방적 요구였다.
실제로 '한반도 비핵화 선언' 이후 한국 정부는 조선이 먼저 핵무기를 포기해야 한반도의 평화가 가능하다며 조선을 봉쇄하는 제재 조치에 적극적으로 가담해왔다. 그저 정권에 따라 조선의 선 비핵화냐 비핵화와 제재 해제를 함께 진행할 것인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먼저 제재를 풀기 위해 움직이겠다는 제안을 건넨 적은 없었다. 그 결과 조선이 스스로 봉쇄를 풀 수 있는 방법은 항복 아니면 핵무기 개발뿐이라는 결론으로 도달하게 만든 것이다. NPT 체제가 한반도 비핵화라는 이름으로 작동하는 방식이었다.
그렇게 30여 년 한국과 미국은 조선과 평행선을 달리는 협상을 이어갔지만 평화는커녕 군사적 긴장도 완화하지 못했다. 결국, 2019년 조선과 미국의 하노이 협상이 아무런 성과 없이 끝난 후 조선은 핵무력 완성과 자력갱생을 외치며 같은 실패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후 조선은 한반도 비핵화를 완전히 거부하고 핵무기 고도화에 매진했다. 한국과의 연락망은 모두 닫았고, 통일 지향도 폐기했다. 미국에도 더는 제재 해제를 위해 매달리지 않고 핵무장 국가로서 상호대화하겠다고 한다. 한반도 평화의 당사국인 한국 정부는 조선에 철저히 외면당하고 있다. 한국의 보수세력은 북한의 핵무기에 대응하기 위해 한국에도 핵무장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하지만, 정작 미국은 한국의 안보를 지켜주는 비용을 더 내라고 할 뿐, 핵무기 보유를 쉽게 허용하지 않는다.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은 높아져 가지만 한국 정부가 상황을 풀어가기 위한 선택지는 잘 보이지 않는다. 핵우산 아래 조선의 불가역적 비핵화만을 선결로 내건 평화 체제의 구상이 마주한 처참한 결과다.
한반도 평화를 위한 새로운 구상이 필요하다
이제 한국 정부가 해야 하는 일은 한반도 평화를 위한 새로운 그림을 제시하는 것이다. 이재명 정부는 조선과의 평화적 공존을 바란다며 체제를 존중하고, 흡수통일을 추구하지 않고, 적대행위를 하지 않겠다는 세 가지 원칙을 밝혔다. 이후 평화 조치를 선제적으로 하겠다는 의지 또한 드러냈다. 하지만 조선은 거부 아니면 무응답으로 일관하고 있다. 이재명 정부도 여전히 미국의 핵우산 아래 조선 비핵화를 포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조선은 미국 대통령도 조선의 핵무기 보유를 부정하지 않고 대화에 나서려는 상황에서 조선 비핵화를 외치는 한국과 대화할 이유가 없다. 이제 더는 같은 실패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 한반도 평화를 원한다면 평화로 나아갈 수 있는 새로운 구상과 제안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다음 두 가지 사항이 중요하게 고려되어야 한다.
먼저, 한국도 핵무장을 해야 한다거나 세계 5위 수준의 군사력을 더욱 증강해야 한다는 주장을 일축해야 한다. 상대가 핵무기를 가졌으므로 이를 억제하기 위해 우리도 핵무기를 가져야 한다는 주장은 핵확산의 전형적인 경로였을 뿐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오히려 군사적 긴장을 낮추기 위한 선택이다. 가령, 2021년 발효된 '핵무기금지조약' 가입을 적극 고려해야 한다. 핵무기금지조약은 NPT 체제의 한계를 인식하고 이를 대체하기 위해 모든 국가의 핵무기 보유를 금지한 조약이다. 한국도 핵무기 피해국이다. 1945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 피해자 중 7만 명이 한반도에서 건너간 이들이다. 하지만 이런 원폭 피해 당사국인 한국은 미국의 핵우산 아래에 있다는 이유로 핵무기금지조약에 가입하지 않았다. 핵무기를 포함한 군비경쟁이 아닌, 핵군축과 군비축소로 평화구상의 방향이 바뀌어야 한다.
둘째, 한반도 평화를 바란다면 동아시아 지역의 군사적 긴장과 적대해소를 우선과제로 삼아야 한다. 러시아와 중국이 조선의 핵무기 보유에 대해 승인 또는 묵인으로 태도가 달라졌고, 미국은 조선의 핵보유를 용인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일본도 비핵 3원칙을 흔드는 흐름이 포착되고 있다. 시시각각 변화하며 긴장이 고조되는 정세 속에서 동아시아 평화를 구축하기 위한 구상없이 조선만을 바라보며 비핵화를 외친다면 우리는 또다시 미국의 핵우산 아래 군사적 긴장을 고조할 뿐이다. 이제 조선을 겨냥한 비핵화 요구는 내려놓고, 동아시아 평화체제와 군축을 위한 구상이 필요하다. 특히 한국, 일본과 수교조차 맺지 못한 조선과의 적대해소가 가장 중요하다. 한국과 일본의 핵무장 논의를 잠재우고, 더 나아가 중국, 러시아, 미국, 조선의 핵무기 감축을 목표해야 한다. 비핵화를 통한 평화체제가 아닌, 적대관계 해소와 평화체제를 통한 핵군축의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평화를 원한다면 핵이 아니라 평화를 택하라
전 세계가 군비를 증강하고 핵무장을 통해 스스로를 지켜야 한다는 압박을 받고 있다. 높아진 긴장은 국경을 타고 대륙을 넘어 다른 전선과 연결되어 모두의 긴장을 증폭시킨다. 이미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나 미국-이스라엘의 이란 침공은 한반도의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우크라이나에 무기의 공급을 하는 나라 중 하나가 한국이다. 미국과 더불어 한국이 전쟁 무기상 역할을 자처하며 K-방산의 경제적 성취를 자축하는 동안 조선은 러시아에 군대를 파병했다. 미국의 이란 침공에 협조하라는 파병 요청을 단호히 거부하지 못하는 상황도 마찬가지다.
미국이 일으키는 전쟁에 휩쓸려 다니는 국가가 한반도에서만 평화를 제안하면 그 진의를 의심받는 것은 당연한다. 전 세계 정치 지도자들은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을 불러오는 핵무기를 감축하고 해체해야 한다는 원칙을 잊어가는 듯하다. 동아시아, 유럽, 중동 곳곳에서 각자의 앞마당에 핵무기를 배치하거나, 다른 나라의 핵무기를 공유하기 위해 동분서주 움직여 나간다.
하지만 우리는 잊어선 안 된다. NPT 체제의 실패는 핵무장의 전면화가 아니라 핵무기 폐기를 위한 새로운 구상과 합의로 나아가야 한다. 평화가 요원해 보일수록 평화를 지키기 위한 원칙을 다시 확인하자. 정부가 이 원칙을 지키기 위한 선택을 스스로 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모여서 함께 요구하자. 핵무기가 아니라 평화를 택하라고 말이다. 한반도 평화는 물론, 전 세계 어느 곳에서도 평화는 핵무기로 지킬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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