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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RT 궤도 공사 노동자로 일하던 남편은 왜 스스로 세상을 떠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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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RT 궤도 공사 노동자로 일하던 남편은 왜 스스로 세상을 떠났을까

[인터뷰] "남편은 사고 이후 아무도 자신의 고통을 인정해주지 않는다며 괴로워했다"

박명숙(가명) 씨가 남편 장준(2013년 당시 40세) 씨와 결혼한 건 2013년이다. 둘 다 북한 이탈주민으로 2012년 한국에 들어왔다. 북한이 살기 힘들어 목숨을 걸고 남한에 왔지만 이곳에서 적응하기란 쉽지 않았다. 남편의 첫 직장은 전기회사였으나 1년을 채우지 못하고 그만뒀다. 사회생활에 적응하기 어려웠다.

이후 지하철 궤도 공사 작업을 하는 회사에서 일했다. 말이 좋아 회사지, 원청으로부터 공사 구역을 배정받아 일하는 물량팀이나 다름 없었다. 일은 힘들었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이었다. 새벽 5시에 출근해 저녁 5시에 퇴근했다. 일이 많은 날은 저녁 8시까지 일하기도 했다. 그렇게 일해서 하루에 받는 돈은 9만 원. 같이 일하는 한국인이 받는 15만 원보다 절반 가까이 적은 돈이었다.

탈북민이라는 이유에서였다. 불법이었지만, 뭐라고 할 수 없었다. 불만 있으면 그만두라는 소리가 나올게 뻔했다. 일하다가도 팀장 등에게 일을 못한다며 모멸 섞인 말들을 수없이 들었다. 참는 수밖에 없었다. 일을 그만두고 다른 일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그렇게 10년간 일하면서 임금은 9만 원에서 16만 원으로 올랐다. 차별은 여전했다. 같은 경력의 한국인은 19만 원을 받았다. 팀장에게 수 차례 일당을 올려줄 것을 요구했으나 말로만 달래고 회유할 뿐 실질적인 개선은 없었다.

그러던 중 2024년부터 SRT 궤도 공사가 늘어나면서 남편 일하는 시간도 늘어났다. 잠은 집에서 잤던 사람이 그때부터 보름에 한 번꼴로 집에 들어왔다. 야간근무는 기본이고 밤샘 근무도 잦았다. 일이 끝나면 집에 가기보단 공사장 인근 회사 기숙사에서 쪽잠을 자는 식이었다.

박명숙 씨는 가끔 들어오는 남편에게 일을 그렇게 하면 되느냐고 다그쳤지만, 상황상 어쩔 수 없다는 말만 돌아왔다.

연속 3일 밤샘 작업을 하기도

일은 갈수록 더욱 힘들어졌다. 새벽 5시에 일을 시작해 밤 12시 넘어서 일하는 것도 모자라 다음날까지 일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어떤 때는 연속 3일을 그렇게 일하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일을 견디지 못하고 도망가는 사람도 생겨났다. 그러면 남편의 일은 더욱 가중됐다. 새로운 사람이 채용될 때까지 도망간 사람의 일을 맡아야 했다.

이러한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근무하다 보니 늘 극심한 피로와 수면 부족에 시달려야 했다. 직장 내 괴롭힘도 함께 겪다 보니 몸과 마음이 동시에 무너져 갔다. 남편은 돈을 한 푼이라도 더 벌려고 본인 차량 스타렉스를 현장 작업 차량으로 제공했으나 다른 이들이 제공한 차량 일당에 비해 낮은 금액(하루 2만 원)을 지급 받았다. 게다가 차량이 고장 나면 수리비는 본인이 모두 부담했다.

더구나 차량 일당을 주지 않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남편에게 동의도 받지 않고 직장 동료들 회식비를 차량 일당으로 충당하기도 했다. 회사 관리자가 회식 자리에서 남편 동료들에게 '오늘 회식은 장준(남편)이 쏠 거니 맘껏 먹어라'고 대놓고 말하면 분위기상 남편은 이를 받아 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2024년 8월 8일. 남편이 저녁 8시께 집으로 돌아왔다. 보름만이었다. 지난 3일 동안 쪽잠을 자면서 일을 했다고 했다. 집에 오자마자 쓰러지듯 잠을 잤다. 휴식은 길지 않았다. 회사는 그날 밤 12시께 남편에게 전화를 했다. 새벽에 철근 자재 하차 작업이 있으니 새벽 1시까지 출근하라는 내용이었다.

4시간 수면으로 피로를 회복하기란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도 다시 옷을 입고 출근을 준비했다. 가지 않았다가는 해고될 게 뻔했다. 현장에서 남편이 맡은 일은 자재 하차 작업 및 신호수 업무였다. 하지만 급하게 작업이 진행되는지라 신호복이나 신호봉 등을 남편은 지급 받지 못했다. 캄캄한 밤에 작업복만 입고 신호봉 대신 나무 막대기로 진입 차량을 통제해야 했다.

그렇게 신호수 작업을 하던 남편이 자재 차량 운전수와 시비가 붙었다. 피곤함에 지친 남편은 운전수의 거친 말들에 신경질적으로 반응했고 서로 옥신각신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러자 당시 현장관리책임자가 남편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야 XXX야, 일 그따위로 밖에 못하나. XXX 집에 가라.'

그러면서 남편 손에 든 나무 막대기로 이마를 내리치고는 바닥에 남편을 내동이쳤다. 남편도 참지 않았다. 며칠 밤을 일하다가 겨우 잠에 들었는데, 그마저도 끌려나와 일하는 상황이었다. 여기에 욕설과 폭행까지 당하니 눈이 돌아갔다. 현장 책임자에게 대들면서 엉겨 붙었다. 체격이 왜소한 남편은 거의 일방적으로 맞을 수밖에 없었다.

이마가 찢어지고 등에 피멍이 드는 상처를 입은 남편은 일단 병원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해 자기 차를 타고 공사 현장을 빠져나왔다. 더 있다가는 큰 사고가 날 듯했다. 그러다가 이내 생각을 고쳐먹고 공사 현장으로 돌아갔다. 이대로 현장을 이탈하면 해고될 게 뻔했다.

▲ 트럭이 밟은 발(왼쪽), 머리에 맞은 상처(오른쪽). ⓒ박명숙 제공

산재 신청했으나 회사에서는 '산재 불인정'

남편은 현장에 돌아갔으나 분노가 가라앉지 않았던 현장 책임자와 다시 시비가 붙었다. 그렇게 상황이 커지던 와중에 자재를 실은 트럭이 공사 현장으로 진입하다가 남편 발을 깔고는 정차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남편은 아프다고 소리를 질렀으나 차 엔진 소음으로 운전기사 귀에 들어가지 못했다.

결국, 10분가량 그 상황이 이어진 뒤에야 남편 발은 트럭 바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남편의 안전화는 찌그러졌고, 그 안의 발은 삽시간에 부풀어 올랐다. 이런 상황에서도 현장 책임자는 아무런 응급조치도, 119도 부르지 않았다. 결국, 남편은 다른 동료 차량에 실려 병원으로 가야만 했다.

병원에서 현장 관리자에게 폭행당한 부위는 전치 3주 진단을 받았다. 트럭 바퀴에 밟힌 발은 염좌를 비롯해 금이 가는 등 여러 문제가 생겼다.

하루 벌어 하루 사는 막노동 입장에서 입원비, 치료비 등이 부담스러웠다. 발을 다쳐 퇴원 후에도 상당 기간 일을 할 수 없게 됐다. 산업재해를 신청하려 한 이유다.

입원해 있던 남편은 회사 관리자에게 전화해 산업재해 신청을 하겠다고 통보했다. 그러자 관리자는 남편에게 신청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남편 때문에 회사가 불이익을 당할 수 있다며, 산재를 신청할 경우,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막겠다고 했다.

회사 도움 없이 산재를 인정받기란 쉽지 않았지만 그래도 근로복지공단에 산재를 신청했다. 몸에 후유증이 남을 경우, 오롯이 남편 개인이 져야 했다.

회사는 경고한 대로 산업재해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견서를 근로복지공단 측에 제출했다. 남편이 다친 것은 동료 노동자들과 다툼을 벌이는 과정에서 발생한 사고로 당일 작업과는 무관하다는 게 이유였다.

10년 넘게 일해온 회사에서 자신에게 이렇게까지 한다는 것에 대해 분노했다. 더구나 남편은 당시 상황 관련한 아무런 증거도 가지고 있지 못했다. 함께 일했던 회사 동료들이 증언을 해주면 되겠지만, 회사에 적을 두는 이들이 회사의 의견과 반대되는 증언을 할 리 만무했다.

치료비와 입원비, 생활비도 모두 감당해야 하는 상황

산업재해를 신청하면서 사실상 회사와의 관계는 끝난 셈이었다. 남편은 자신을 폭행한 현장 관리자를 폭행죄로 경찰서에 고소하기도 했다. 결과는 무혐의였다. 합의를 종용하는 관리자의 요구에 남편이 넘어갔다. 합의금 200만 원으로 처벌불원서를 경찰에 제출했고 그로부터 15일 뒤 사건이 종결됐다.

치료비와 입원비, 이후 생활비 등은 모두 남편이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몸도 성치 않았다. 차량에 짓눌린 발은 치료가 다 끝났으나 밤마다 수백 개의 바늘이 찌르는 고통이 몰려왔다. 늘 지팡이를 짚고 다녀야 했다. 이런 몸으로 다른 곳에 취업하기도 어려웠다.

아내인 박명숙 씨는 그때부터 남편이 이상해지기 시작했다고 했다. 평상시 말수가 적었지만 다정다감하고 자상했던 남편이었으나 사고 이후에는 자그마한 일에도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말투는 늘 화가 나 있었고, 밤에는 거의 잠을 이루지 못했다.

본인 몸에 난 상처보다 정신적인, 마음의 상처가 점점 더 깊어지는 듯했다. 자신이 폭행죄로 고소한 회사 현장관리자와 간부들이 자신을 죽일 수도 있다며 호신용 가스총과 가스 충격기를 구입한 뒤, 늘 몸에 지니고 다녔다.

한 번은 아내인 박명숙 씨가 볼일이 있어서 1시간 정도 밖에 나갔다가 집에 돌아오니 경찰 두 명이 남편과 함께 있었다. 휴대전화를 두고 아내가 나가자 남편이 경찰서에 실종신고를 했다. 아내를 본 남편은 '야, 이 XX야, 어디 갔나 왔냐'며 평소 볼 수 없는 욕설을 퍼부었다.

식당에서도 시비가 붙어 경찰서에 연행되기도 했다. 그 사이 담배를 거의 피우지 않던 남편은 하루에 3~4갑을 피우는 사람이 됐다. 다른 일을 하려고 해도 몸이 불편해 할 수가 없었다. 사람이 무서운 것도 한몫했다.

"사고 이후 아무도 자신의 고통을 인정해주지 않는다며 괴로워 했다"

회사에 대한 배신감, 앞으로 살 길에 대한 막막함 등으로 심각한 우울증을 겪고 있는 남편은 결국, 부인 명숙 씨가 집을 비운 사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남편을 잃고 기초수급자가 된 명숙 씨는 현재 임대주택에서 살고 있다. 지난 5월 22일에는 고용노동부에 남편의 생전 노동환경과 사고 직후 방치 관련해서 회사를 처벌해달라고 진정서를 제출했다.

명숙 씨는 "지난 10년 동안 인간다운 대우를 받지 못하고 일했던 남편은 사고 이후 아무도 자신의 고통을 인정해 주지 않는다며 괴로워 했다"며 "극심한 스트레스와 불안감, 정신적 고통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냈다"고 설명했다.

명숙 씨는 "남편의 죽음은 그간 쌓여온 살인적인 장시간 밤샘 연속 근무와 현장 간부들의 직장내괴롭힘, 사고 이후 제대로 된 보상도 대처도 받지 못한 울분 때문"이라며 "여기에 회사의 산재 불인정 의견서는 마지막 동아줄도 놓아 버리게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장준 씨는 2024년 8월 9일 사고를 당한 뒤, 열흘 뒤인 8월 19일 산업재해를 신청했다. 그로부터 7일 뒤인 8월 26일 회사는 산재 불인정 의견서를 근로복지공단 측에 제출했다. 근로복지공단 측은 장준 씨 건을 조사하려 했으나 당사자와 연락이 닿지 않아 9월 19일 사건을 반려했다. 이후 장준 씨는 2025년 3월 11일 다시 산재를 신청했고 근로복지공단 측은 경찰 조사 내용과 직장 동료 증언 등을 토대로 그해 6월 19일 산재 불승인 처분을 내렸다. 장준 씨는 산재 결과를 기다리던 4월 14일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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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환주

2009년 프레시안에 입사한 이후, 사람에 관심을 두고 여러 기사를 썼다. 2012년에는 제1회 온라인저널리즘 '탐사 기획보도 부문' 최우수상을, 2015년에는 한국기자협회에서 '이달의 기자상'을 받기도 했다. 현재는 기획팀에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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