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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문실'에서 바라본 한국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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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문실'에서 바라본 한국전쟁

[달리는 기차에서 본 세상] <심문실의 한국전쟁>

오늘 한반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한국전쟁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원자폭탄 시대에 벌어진 최초의 거대한 군사적 충돌이자 미국이 20세기 내내 개입할 전쟁의 본보기가 되었다는 한국전쟁을 보는 새로운 창이 지난 6월 한국에 도착했다.

미국 역사학자 모니카 킴은 포로 심문실을 통해 한국전쟁과 그 시대를 관통하고 있는 국제정치, 냉전의 양극이 만나서 스파크를 일으켰던 과정들을 세밀하게 보여준다. 더불어 책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전쟁이란 거센 파도 속에서 소설보다 더 극적인 이야기를 쏟아낸다. <심문실의 한국전쟁>(후마니타스)은 그동안 한국전쟁을 분석했던 시각과 틀과는 전혀 다른 맥락에서 해방 이후 한반도에서 펼쳐진 역사를 따라간다.

돌아가신 나의 아버지는 한국전 참전 용사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한편으로는 '빨갱이'라면 치를 떨었는데 공산주의의 실체를 잘 알았기 때문이 아니었다. 한국전쟁 발발 당시 천안 외곽 전의의 가난한 농사꾼 집안에 살던 스물 한 살 청년은 공산주의를 접해본 적도 없었다. 그가 치를 떨었던 이유는 '빨갱이'라는 낙인이 찍히는 순간 한국 사회에서 감내해야 하는 끔찍한 운명 때문이었다. "절대 데모해서는 안된다. 잡혀가면 죽거나 '반병신' 돼서 나온다." 연일 시위가 벌어지던 80년대 중후반 학창 시절, 귀에 못이 박히도록 부친에게 들었던 이야기는 그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노인이 80을 넘기자 더 늦으면 안 되겠다 싶어 수첩과 녹음기 앱을 열고 부친의 과거를 물었다.

전쟁 발발 소식을 뒤늦게 접한 부친은 마을 사람들이 남쪽으로 떠나는 피난길에 합류하여 걷고 또 걸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같은 동네 피난민들과 인민군이 나란히 걷게 되었다. 인민군 진격 속도가 피난민을 추월하고 있었다. 인민군 장교는 마을 청년들을 모아 임시 의용군으로 명했다. 의용군이라고 해 봤자 상의를 하의 속에 넣어 옷을 단정히 하는 것 외에는 무기도 계급장도 없는 피난 청년 그룹에 불과했다. 남쪽으로 향하는 인민군은 전투를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인민군과 피난민은 옥수수와 감자를 나눠 먹으며 미군의 공습을 피해 느린 속도로 남하할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전황이 바뀌어 곧 대대적인 미군과 국군의 반격이 시작될 것이라는 소문이 인민군과 피난민 사이에 돌았다. 부친은 다시 고향인 천안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밤을 틈타 산속에 숨었다가 다시 북쪽을 향해 걸었다.

부친이 추풍령을 넘고 영동을 거쳐 대전에 도착했을 때 이미 시내를 장악한 국군 헌병대의 검문을 받게 되었다. 헌병대의 눈에 시내를 걷는 젊은 청년은 의심스러운 체포 대상이었다.

"야 거기서. 너 누구야?"

"네? 저는 천안사는 000인데요?"

"천안이 집이야?"

"네"

"근데 왜 대전에 있어?"

"난리 통에 피난 갔다가 다시 집으로 가는데요."

"머 이 쌔끼. 신분증 내놔"

"신분증 같은 거 없는데요..."

"이 빨갱이 새끼...야! 이놈 태워"

이렇게해서 부친은 거제도 포로수용소로 가게 된다. 군인이 아니었기에 민간인 수용동에 갇혔다가 국군에 입대하면서 풀려났지만 수용소에서의 경험은 트라우마로 남아 불을 끈 방에서는 잠을 못 자는 등 평생 부친을 괴롭혔다.

▲심문실의 한국전쟁 ⓒ후마니타스

<심문실의 한국전쟁>의 첫 장면은 스무 살 청년 오세희의 에피소드로 시작된다. 민주청년동맹이라는 좌익 단체에서 활동했던 오세희는 인천 상륙 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되자 함께 퇴각하던 인민군 무리에서 빠져나와 고향인 경북 의성으로 향한다. 오세희는 고향으로 가는 길에 누구를 만나게 되더라도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자신을 증명할 수 있는 증명서를 몸 곳곳에 나눠 숨겼다. 모자 속에는 인민군에게 받은 "애국자 증명서"가 있었고 상의 윗 주머니에는 유엔군 정찰기가 살포한 "귀향증"이 있었다. 이 귀향증에는 생명을 보장한다는 문구가 있었다. 바지 오른쪽 주머니에는 서울대학교 학생증이 왼쪽 주머니에는 시골 중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당시의 교사증을 넣어놨다. 필요에 따라 전략적으로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증서였다.

오세희 앞에 차가 급정거하고 국군 중위가 총을 겨누며 내렸다.

"넌 뭐야?"

"이 새끼야, 이런 거 필요없어" 중위는 오세희가 내민 귀향증을 찢어 버렸다.

이어서 내보인 서울대 학생증도 찢어 버렸고 교사증도 팽겨쳤다.

중위는 오세희에게 모자를 벗어보라고 했다. 오세희는 모자를 벗어 어깨 너머로 던져버렸다.

"야, 이 새끼 봐라!"

중위는 오세희가 짧게 깎은 인민군 병사의 머리 모양이 아니었기에 인민군은 아니라고 확신했다. 그렇게 오세희는 거제 포로수용소로 가게 된다. 유엔군이 보장한 귀향증도 서울대 학생증도 한낱 육군 중위 앞에서는 무용지물이 되었다. 만약 오세희가 벗어 던진 모자 속에서 "애국자 증명서"가 튕겨져 나왔다면 오세희는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거제 포로수용소에는 북한군 포로, 중국군 포로, 국군 포로, 민간인이 있었고 또 이들은 친공과 반공으로 나뉘었다. 일반적인 전쟁이라면 포로는 상대국의 병사들인 것이 상식이다. 이렇게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존재하는 포로는 한국전쟁이 특수한 역사적, 정치적 환경 속에 존재했던 사건 임을 알 수 있다.

모니카 킴은 "전쟁이란 오직 주권을 인정받는 국가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음을 기억해야 한다"고 말한다. 8.15 해방이후 한반도는 탈식민지화를 수행하면서 독립적인 주권 국가를 수립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다.

탈식민지화는 일본 점령 통치의 유산을 청산하고 한반도 전체를 아우르는 주권 국가를 세워내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러나 세계는 냉전이라는 거대한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리는 중이었다. 냉전의 두 축을 이루는 거대 국가 미국과 소련이 날카롭게 부딪힌 곳이 한반도였다. 카이로 선언에 약속된 조선의 독립은 "적절한 시기에"라는 말에 족쇄가 채워졌다. 미국은 적절한 시기란 현재가 아닌 먼 미래의 일로 간주했고 자신이 점령군임을 스스럼없이 내세웠다.

해방정국속에는 수많은 플레이어 들이 권력의 향배에 따라 부상하고 소멸해갔다. 건국준비위원회와 조선인민공화국을 통해 새로운 자치 국가의 틀을 만들려고 했던 사람들, 숨죽이며 살 궁리를 하던 친일파들, 해외에서 귀국한 독립운동가들, 수많은 정치 사회 단체들이 이 미소 군정 당국과의 견제와 협력 속에서 지평을 넓히려 했다.

미국은 점령 통치의 편의를 위해서 일본 지배 시절의 인사들을 다시 불러들였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졌다는 방첩대는 반공 청년 단체들을 손발로 삼았다.

38선은 시간이 갈수록 남과 북, 세계의 이질적인 두 세력을 분할하는 상징이 되었다. 그리고 1950년 북한군의 침략으로 38선은 무너졌다. 이 전쟁은 국민 국가간의 전쟁이 아니었다. 남과 북은 상대의 국가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미국과 UN은 한반도에서 유일한 국가는 UN의 승인을 받은 대한민국이라고 했고 북한은 제국주의 간섭없이 인민의 의지로 성립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만이 유일한 주권 국가라고 주장했다.

국가 간의 전쟁에서 포로는 전쟁이 끝남에 따라 자신의 국가로 돌아간다. 그러나 한국전쟁에서 발생한 포로들은 이 같은 원리론과는 다른 상황에 던져졌다. 이 이상한 전쟁, 국가 간의 전쟁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남북을 지원하는 20여개국이 참전한 미니 세계대전 같은 전쟁은 결국 누가 정의인가라는 상징을 얻는 것으로 귀결된다. 38선을 기준으로 진행되었던 전쟁이 포로 심문실이라는 공간으로 전이된 것이다.

상대의 국가적 정당성을 부정했기에 전쟁의 당위성과 정의를 인정받아야 하는데 포로들은 상대의 불법성과 우리의 정당성을 밝혀줄 수 있는 재료가 된 것이다. 미국은 제네바 협정의 상대국 포로는 전쟁이 끝난 뒤 송환한다는 원칙을 뒤엎고 포로들의 선택과 그 결정을 존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북한군 포로로 잡혔지만 지옥 같은 공산 체제에 염증을 느껴 자유세계로 돌아와 새 삶을 살게 되는 스토리는 미국이 지향하는 새로운 세계 체제를 정당화시키는 서사가 된다. 이미 제국으로 성장한 미국이 미국식 자유주의를 인류 보편의 가치로 등치시키면서 자본주의대 공산주의는 선과 악의 대결로 전화한다.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 크게는 냉전 시대 대 공산주의 전략이 실제로 구현되는 창구가 낡은 군복을 걸친 포로들이 앉은 심문실이었다.

이 책은 해방 전 조선의 사회상부터 해방 정국, 그리고 한국전쟁 속 거제와 압록강, 판문점 수용소에서 있었던 포로들의 생활을 보여준다. 그 과정속에서 미국의 조선에 대한 무지, 인종주의 문제, 미국 방첩대를 배경으로 강력하게 뿌리내린 서북청년단 등 반공 테러단체 들이 어떻게 한국 군대와 경찰의 비호를 받거나 그 속에 자리 잡게 되는지, 아울러 이 반공 청년 단체들이 포로수용소를 장악하고 반공의 보루로 서는 과정도 보여준다. 또한 태평양전쟁 발발 후 적국 출신이라는 이유로 미국 내 수용소로 강제 이송됐던 재미 일본인들이 한국전쟁 발발후 미군 소속으로 포로 심문자로 나서거나 북한 포로수용소의 미군 이야기 등 미처 알지 못했던 이야기들도 흥미롭다.

북한군 포로 대부분은 인천상륙작전 후에, 국군과 미군 포로들은 중국군의 참전 이후에 발생했다. 이 두 거대 공세 뒤에 전선은 옛 38선 부근에서 정체되었다. 나는 한국전쟁이 1951년 현재의 휴전선 부근에서 고착 상태에 빠진 뒤에는 굳이 이어갈 필요가 없었는데 왜 끝나지 않았는가 의문을 품어왔었다. 남과 북 모두 한 뼘의 땅이라도 원수에게 양보할 수 없다는 수사를 동원했지만 고착된 전선에서 2년 동안 숨져간 무고한 젊음들의 생명과 바꿀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저자는 심문실이 거대한 연극공연장과 다를 바 없었다고 한다. 수용소와 체제 설득실에서 남북한 장교들과 포로들이 펼쳐내는 퍼포먼스는 한 맺힌 블랙코미디 시대극이었다.

<심문실의 한국전쟁>은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저자의 집요한 취재가 돋보인다. 이런 글이 가능했던 것은 저자의 치열한 문제의식과 한국계 미국 학자라는 존재 환경이 결합된 결과이기도 할 것이다. 저자의 땀으로 가득한 책을 만나는 것만큼 독서인들에게 즐거운 일이 또 어디 있을까. 모처럼, 사유의 샘속으로 깊이 빠져들게 만든 좋은 글을 쓴 저자와 이런 책을 발굴해 낸 출판사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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