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극단의 중국인식, 평형추를 찾아서
중국은 한국전쟁 참전국으로서 정치대국 지위를 회복한 이래 개혁개방으로 경제대국화에도 성공했다. "100년 굴욕"의 반半식민지였던 중국이 이를 바탕으로 최근 미국과 패권을 겨룸에 따라 국내외의 중국인식은 극단적으로 분기하고 있다. 제국화를 우려하며 위협론을 퍼뜨리는 패도중국론, 식민제국의 길을 간 구미 열강과 달리 전례 없는 평화발전의 모델이라고 여기는 왕도중국론이 그것이다. 어느 쪽도 중국은 예외적인 국가라는 것이니 실사구시의 평형추가 절실한 상황이다.1)
나는 이런 양극단의 편향을 넘어 실상에 근접한 중국인식에 다가가고자 <제국공화주의: 현대중국의 자기인식과 역사서사>(한울아카데미, 2025.10)를 펴냈다. 현실의 정치·외교를 다루는 사회과학자와 달리 가까운 과거인 현대중국 100년(1912년 공화국 수립 이후)을 제국공화주의의 관점에서 거시적으로 조망한 결과물이다. 역사학자로서 현실의 중국을 과거와 연관지어 좀 더 긴 안목에서 파악하고자 시도한 것이다.
제국공화주의란 신해혁명 와중에 대청제국의 제국성을 유지하면서 공화국을 건설하자는 건국 구상이다. 이민족에 대한 위계적 지배를 추구하는 제국성과 어떠한 위계도 허용하지 않는 공화성 사이의 모순과 긴장을 직시하면서도 양자를 절충하려는 하이브리드적 사고다. 이는 중국인의 관념과 지향으로 장기 지속되어 자기인식의 골간을 이루었다. 따라서 제국공화주의는 공화와 반제反帝로 시작된 현대중국이 공화성과 함께 제국성을 보인 복잡성을 핍진하게 드러내고 이를 미국·프랑스와 비교해 중국예외론을 넘어설 인식 틀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현대중국이라는 거대한 복잡계의 급소를 파악하기 위해 나는 제국과 중국 개념을 세 심급으로 나누어 접근했다. 제국은 황제의 유무와 상관없이 이역·이족을 위계적으로 지배하는 광역지배 체제를 기본 요건(제국1)으로 하며 대외적으로 자국 중심의 국제질서를 형성하고 참여국들이 공감할 문화적 매력을 갖춰야(제국2) 비로소 충분조건을 갖춘다. 제국1의 영토적 지배를 군사기지로 대신한 특수한 사례(제국3)도 있다. 흔히 제국1을 곧 제국으로 여기는데 그러면 UN 회원국의 90%를 차지하는 다민족국가와 구분되지 않는다. 제국1을 제국성의 한 요소로 포함하는 제국2야말로 진짜 제국이다.
진한이래 명청에 이르는 역대 중국은 제국2였으나 19세기 말 열강의 침략 속에 제국1로 위축되었다. 이 상태에서 신해혁명이 일어나 '중화'민국이 수립되고 비로소 '중국'이 정식 국명의 약칭으로 되었으니 '중화/중국'의 아이러니이자 슬픔이 아닐 수 없다. 제국2의 제국성 회복을 향한 현대중국의 갈증은 여기서 말미암는다.
공화만세와 제국관성: 제국공화주의
신해년(1911)의 혁명으로 대청제국이 중화민국=중화공화국으로 바뀌자 "공화만세"의 함성이 전국에 가득했다. 그러나 공화만세는 잠시 겉에 드러난 열기였을 뿐 제국관성의 힘 앞에 이내 혼미해졌다.
군주입헌 노선의 청조 측과 민주공화 노선의 혁명파가 대치하고 있던 상황에서, 1912년 1월 2일 장친張琴 등 3단체 대표 6인은 제국공화주의를 총리대신 위안스카이袁世凱에게 양측간의타협안으로 제시했다. 대청제국 강역인 "대중국"을 보전하려면 정치적 실권을 가진 대통령을 두되 청 황제를 종교적 권위만 가진 대성황으로 존속시켜 한·만·몽·회·장 5족을 아우르는 심리적 구심점으로 삼고 소수민족의 동의에 기초해 공화국을 건립하고 운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족 주도의 공화중국은 4족의 동의를 받지 않은 채 그들을 "중화민족"의 "공화민국"안에 위계적으로 편입했다. "5족공화"의 구호와 함께 "공화민국"이라는 동어반복으로 공화성을 강조했으나 어떤 위계도 허용하지 않는 공화성과 충돌하는 제국성을 내장한 "제국적 공화국"이다. 이때의 "대중국"과 "중화민족"이란 전에 없던 개념이어서 제국2를 향한 제국성까지 온전히 파악하려면 '세 개의 중국' 개념에 유의해야 한다.
'세 개의 중국'은 군현지구인 한족 중국=소중국(중국1), 한·만·몽·회·장 5족을 포괄하는 대청제국 강역의 다민족 중국=대중국(중국2), 그리고 상상된 중국(중국3; 민국시기엔 옛 조공국을 열강에빼앗긴 영토로, 1949년 이후엔 현재 영토 범위를 고대 이래의 것으로 상상)이다. 이 중 어느 것을 기준으로 삼느냐에 따라 제국성의 정도가 달라진다.
중국1은 한漢이래 2천년간 중국인의 심리 속에 깊이 각인된 "심리적 국가"인데 비해 중국2는 1767년 건륭제의 지시로 만주족 고관들 사이에 쓰이다가 아편전쟁 이후 한족 고관과 사대부에게 점차 수용되어 갓 생겨나 낯선 "법률적 국가"다. 중국3이 주로 역사인식에 적용된 것과 달리 중국2는 열강의 침략으로부터 지켜내야 할 현실의 중국임에도 서로 다른 정치성향의 량치차오梁啓超와 쑨원孫文, 루쉰魯迅과 후스胡適 등은 똑같이 양자의 심대한 괴리 앞에서 괴로워했다. 중국1의 일부 혹은 전체가 흉노·돌궐에서 몽·만에 이르는 이적夷狄에 점령당한 역사에 대해 "하늘을 채울 만큼 치욕스러운 중화의 비극"이라 하면서다.
이런 굴욕적인 불일치를 돌파하는 무기가 대중국=5족중국을 거처로 삼는 모든 민족을 포괄하는 "중화민족" 개념이다. 중화민족론은 20세기 초 대중국론이 일반화되면서 량치차오와 쑨원 등에 의해 형성되었는데, 중화민족의 공화국이 곧 현대중국이며 그 구성원리가 바로 제국공화주의다. 이는 5족과 그 강역을 '(대)중국' 영토로 지켜냄으로써 제국1의 제국성을 불안정하게 유지한 정도였고, 이게 어느 정도 안정되면 제국2의 제국성 회복으로 나아갈 것이었다.
공화중국의 약진과 제국2를 향한 열망
그 후 공화중국은 국민당과 공산당 주도로 반제 세계혁명의 중심이라는 자기인식을 형성했다. 반제·반침략의 정의전쟁론을 연결고리로 중국2를 지켜내는 동시에 동방/세계 약소민족과 연대하는 세계적 공화성을 추구하며 세계 5대국의 하나로 약진했다. 이 과정에서 세계혁명의 지휘자를 자처해 제국2의 핵심인 자국중심의 국제질서를 재건하려 시도했으니 국민당의 "삼민주의 인터내셔널"(1924-42)과 공산당의 "동방정보국"(1947-55) 구상이 그 예이다. 양자관계의 전통적 조공질서와 달리 민족자결주의와 다자관계에 기초한 질서를 추구함으로써 공화성을 살릴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이 두 구상은 각각 삼민주의와 마오쩌둥사상을 지도원리로 삼았으나 전자는 코민테른을 후자는 코민포름을 조직 모델로 삼았으니 소련처럼 자국-약소민족 간 본부-지부 관계의 위계적 국제질서를 추구한 점에서 다르지 않다. 그렇기에 양당은 소련이 세계혁명을 지휘하며 이래라저래라 지시하는 고압적 자세에 굴욕감을 느끼며 그 통제에서 벗어나는 동시에 영·미 주도의 "제국주의 사령부"에 불과한 국제연맹/국제연합에도 맞서 세계를 삼분하는 주역이 되고자 열망했다. 그렇더라도 양당 모두 식민지 피압박민족의 해방운동을 지도하고 지원·지지하는 세계적 공화성을 보인 사실은 따로 주목할 가치가 있다. 중화제국의 오랜 관성을 바탕으로 공화국 지도부의 부흥전략을 보여주는 예들이지만 국력이 부족해 의도와 지향에 그쳤다.
개혁개방 이후 국책을 혁명에서 개혁으로 전환함에 따라 중국의 자기인식은 세계혁명의 중심에서 평화발전의 중심으로 바뀌었다. 이제 중국은 UN에서 5대국의 하나로서, 제3세계/발전도상국/글로벌사우스의 대표로서 평화로운 발전의 모델이자 패권적 국제질서 개혁의 견인차라는 것이다. "발전도상의 사회주의 대국"을 자임한 까닭이다. 이는 앞서 본 세계적 공화성의 추구와도 부합하는 왕도중국론이다. 그러나 이를 중국 바깥에서는 산업화의 성공에 따라 제국2의지위를 회복하려는 패권전략으로 본다. 패도중국론이다.
역사서사 속의 제국성·공화성, 그리고 중화성
중국인은 남달리 역사를 중히 여기며 이를 바탕으로 현실을 인식하고 미래를 구상한다. 1-2부에서 다룬 당시인의 현실인식과 짝을 이루어 3부에서 역사인식을 따로 검토한 까닭이다. 여러 형식의 역사서사중 국가·민족 정체성 형성에 가장 부합하는 게 통사라는 점에 유의해 통사서사에 나타난 자기인식의 추이를 검토하였다. 역대 중국의 대외전쟁 인식이 '대외'의 경계를 구분하는 중국의 범위와 역사관에 따라 달라지는 추이를 세 시기로 나누어 살폈다.
민국시기에는 대외용병을 천조상국의 "정벌"(상국이 하국의 잘못을 응징해 바로잡는 정당행위) 혹은 "무용한 전쟁 아니면 국방전쟁"으로 보는 견해(周谷城, 錢穆)가 주류였다. 민족주의사관이 이를 떠받쳤으나 중국 범위는 사실상 중국1에 머물렀다. 인민공화국 수립 이후에는 중국 통치자의 침략전쟁이라는 견해(范文瀾, 呂振羽)가 정통 지위를 차지했다. 마르크스주의 사관이 이를 뒷받침했다. 중국의 범위가 중국2=다민족중국으로 확대됨에 따라 그 내부인 소수민족과의 전쟁은 모두 분열의 통합으로 보되 그 외부의 국가·민족과의 전쟁에 대해서는 정의롭지 못한 침략전쟁으로 인정했다. 이 변화는 사회주의 이념의 공화성이 제국성을 얼마간 제어한 결과라 할 수 있다. 그와 짝을 이루어 조공국을 자국 영토로 여기던 상상된 중국=중국3은사라지고 인민공화국 영토를 고대 이래 고정된 것으로 상상하는 신중국3이 만들어졌다.
개혁개방 시기에는 침략전쟁 서사가 아예 사라지고 부흥중화의 평화중국 서사(白壽彛, 曹大爲)가 이를 대신했다. 제국성에 대한 성찰은 급속히 약해졌고, 생산력 사관이 이를 뒷받침했다. 각론에서는 부분적으로만 적용되던 다민족중국론이 이때 전면화되었다. 방대한 권수의 분야별 통사를 편찬해 중화민족의 일체성과 우수성을 강조하고 부흥중화의 의지를 과시했다. 아울러 사회주의 시장경제로의 개혁을 성공시킴으로써 세계를 향해 사회주의 제도의 새로운 발전 경로와 모델을 제시하는 중국이라는 자기인식을 분명히 했다. 이를 바탕으로 중국은 중화의 기백과 풍모를 갖춘 "중국 특색 세계사" 체계를 세워 국제학계에서 담론권을 형성하기 위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이같은 통사의 서사는 1-2부에서 다룬 현실인식에 조응하면서 그것을 역사적으로 정당화하는 추이를 보였다.
두 개의 예외주의를 넘어
'평화중국' 서사를 앞세워 공화중국에 제국성은 없다고 하는 중국 자신의 왕도중국론도, 그 바깥의 패도중국론도 자기가 보고 싶은 일면을 전부인 것처럼 포장한 예외주의적 허상이다. 기실 유가는 문덕교화의 평화중국을 추구했으나 이는 이상일 뿐 실제로 역대 중국의 통치자는 왕도와 패도를 혼용해 제국을 건립하고 운영했다. 세계사 속의 제국들도 마찬가지다.
특히 근대 공화국의 모델로 꼽히는 미국·프랑스에서도 공화성과 제국성의 절충과 긴장이 혁명직후부터 장기간 지속했다. 독립선언과 인권선언에 명시된 공화주의 이념에 따라 제국의 유혹에 맞서야 한다는 측과 국위선양을 앞세워 제국화를 추진한 측 간의 논쟁이 벌어졌으나 결국 로마 공화국의 선례를 들어 식민지를 확대하고 "제국적 공화국"의 길을 걸었다. 신해혁명기 중국에서도 흡사한 논쟁이 일어났거니와 장친 등 제국공화주의자들은 미·프의 선례를 들어 자신을 정당화했다. 중국보다 제국 경험이 훨씬 적은 미·프도 이랬으니 이를 참조한 공화중국이 제국관성을 바탕으로또 하나의 "제국적 공화국"이 되려는 전략을 취한 것은 예외적이기는커녕 자연스럽다.
그러나 공화이념과 주권국가 관념이 보편화된 21세기에 중국이 제국2나 군사기지에 기초한 제국3의 길을 가려면 이전의 미·프엔 없던 딜레마를 해결해야 한다. 전통시대 국방상 중화의 울타리藩屬로 여기던 사방의 이웃나라들이 모두 주권국가가 되어 타국의 간섭과 통제를 거부하면서 역대 중국의 침략사에서 상기되는 두려움을 간직하고 있는 만큼 과연 그들이 중국의 국제적 공화성을 인정하도록 만들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다. 이는 중국 스스로 국내적 공화성을 증진해 각국이 공감할 문화적 매력을 창출해야 하는 과제와 연동돼 있다.
중국의 안보 딜레마와 이웃나라들의 역할
중국은 사방의 이적들에 둘러싸인 광대한 평원인 중원을 핵심부로 하는 국가이기에 늘 뛰어난 전투력을 갖춘 이적의 포위 공격에 노출되었다. 그로 인해 조성된 안보 딜레마는 고대 이래 중국인에게 강렬한 포위공포증을 유발하여 장기 지속시켰고 대외전략에도 영향을 미쳤다. 현대중국도 이웃나라들의 연대와 단결을 포위로 느껴 두려워하는 까닭이다. 냉전 시기 미·소두 초강대국의 포위에 대한 중국의 공포증을 간파한 키신저는 중·미 국교 정상화 협상(1971)에서 이를 자신의 지렛대로 활용했을 정도다.
이런 맥락을 고려하면 한국을 비롯한 이웃 중소국가들의 역할은 중국의 제국화 전략에 중요한 변수의 하나다. 그 관건은 중국과의 양자관계라는 비대칭의 구조적 제약에서 벗어나 다자간 연대와 단결 속에 중국의 제국성을 감시·제어할 수 있느냐의 여부다. 가령 중국 통치자로서 역사상 자국의 대외침략을 인정한 첫 사례는 1954-57년의 마오쩌둥이다. 당시 그는 동남아 각국 지도자와 만나 "중국 봉건제국"의 대외침략 사실을 인정하고 더 나아가 현대중국도 향후 산업화를 이룩하면 또 그럴 수 있다며 국제사회가 감시해야 한다고 공언했다. 왜 하필 그이고 그때일까? 자국 안에서도 사회주의 이념이 제국성을 어느 정도 제어하던 시기의 통치자라는 점과 함께 인접한 중소국가들이 역사상 처음으로 상호 연대하여 반둥회의(1955)를 개최하며 단결한 것에 나는 주목한다.
이제는 중국의 국력이 커진 데다 사회주의 이념도 약해진 만큼 그때보다 더 고양된 연대가 필요하다. 이때 한국을 비롯한 중소국가들 역시 자국의 공화성을 증진하는 노력을 병행해야 호소력을 가질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도 안보 딜레마까지 포함하는 현대중국의 복합적 자기인식을 역사적 맥락에서 파악하는 안목이 긴요하다. 제국성과 공화성의 긴장과 모순적 절충에 주목한 <제국공화주의>가 현대중국 100년을 보는 눈으로서 그런 쓸모에 조금이나마 부응할 수 있기를 고대한다.2)
1) 이 글은 <대학지성>의 요청으로 신간 소개란 "저자에게 듣는다"에 기고한 〈양극단의 중국인식, 평형추는 없는가?〉(2025.12.21.)를 확충한 것이다.
2) 이 책을 서평과 함께 읽으면 그 의의와 한계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될 듯하다. 이원준,〈'공화의 지향'과 '제국의 관성'〉,<인문논총>(서울대 인문학연구원) 83권 1호(2026.2); 이순이,〈공화중국 100년의 역설과 현실중국 인식에 대한 역사학자의 비판적 개입〉,<역사비평> 155호(2026.6); 손성욱,〈공화 안의 제국〉,<황해문화>131호(20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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