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대 위기여성들에게 일상 돌봄과 의료 서비스를 제공해 온 십대여성건강센터 '나는봄'이 지난 4일 문을 닫았다. 서울시가 내년 위기 청소년 통합지원을 위한 신규 지원센터를 출범시키겠다며 기존 센터의 위탁 사무를 종료한 까닭이다.
성매매 여성으로 낙인 찍힌 '경의선 키즈'들과 함께 춤추는 등 10대 위기여성들과 적극적으로 교류하는 모습으로 화제를 불러 모았던 십대여성일시지원센터 '나무'도 올해를 마지막으로 운영을 종료한다. 나무는 청소년쉼터 등과 서비스가 중복된다는 이유로 지난해 서울시의회로부터 재위탁을 승인받지 못하는 등 외부로부터 기관의 필요성을 의심받아 왔다.
연이은 10대 위기여성 지원기관 폐쇄로 여성 청소년들은 불안에 떨고 있다. 운영 종료로 발생하는 지원 공백에 갈 곳을 잃은 것은 물론 추후 새로 출범한다는 통합센터가 기존 기관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을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프레시안>이 만난 4명의 위기 여성들은 나는봄·나무와 소규모 10대 위기여성 지원시설로 인해 자신의 삶이 달라질 수 있었다며 연이은 운영 종료 소식에 아쉬움을 토로했다. 이들은 기존에 잘 운영되던 센터를 없애고 통합센터를 개소하겠다는 서울시 주장에 의문을 표했다. 한 개의 큰 나무가 아니라 지역사회 곳곳에 소규모 지원시설을 설치하는 것이 위기 여성들을 지원하는 더 나은 길이라고 입을 모았다. 위기 여성 청소년 네 명의 이야기를 차례로 소개한다.

"위기청소년들의 목소리를 직접 들을 수 있는 창구를 만들어주면 좋겠어요. 저는 나무가 왜 사라지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열여덟 김민서(가명) 양이 던진 질문은 <프레시안>이 앞서 만난 위기청소년 3명이 가진 의문과 다르지 않다. 십대여성건강센터 '나는봄'과 십대여성일시지원센터 '나무'처럼 위기 십대 여성 돌봄 기관이 운영 종료를 결정하기까지, 각 기관의 도움을 받고 있던 위기여성들은 서울시 등 관리 당국에 어떤 의견도 낼 수 없었다. 이용자들의 목소리를 듣는 자리는 논의 과정에 없었기 때문이다.
안식처를 잃어버린 여성 청소년들은 당사자 의견을 듣지 않는다면 예산과 규모를 키우더라도 10대 위기 여성들을 돕는 데 한계가 있을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가정폭력을 피해 전국을 떠돌다 최근 자취 생활을 시작한 민서 양은 나무에서 기자와 만나 자신이 왜 사회 시스템의 보호를 받지 못한 채 유랑생활을 해야만 했는지, 큰 규모의 기관들에게서 어떤 한계를 경험했는지 차분히 털어놨다.

가정폭력 벗어나려는 중학생 외면하는 사회 시스템…쉼터마저 '보호' 아닌 '퇴출' 택했다
"잘못하면 주먹이 먼저 날아오는 곳". 민서 양이 한 줄로 요약한 집안 분위기다. 교육계 종사자인 민서 양의 어머니는 공부와 다섯 살 터울 동생을 돌보는 일을 제외한 모든 행동을 잘못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민서 양이 3년간 수집한 카드 뭉치를 일언반구도 없이 갖다 버리고, 취미로 그림을 그렸거나 자전거를 타다 다쳐서 돌아온 날엔 방문을 걸어 잠근 뒤 몇 시간 동안 폭행했다. 평소 민서 양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자주 하던 아버지도 훈육을 빙자한 학대에서만큼은 배우자와 뜻을 함께했다.
민서 양은 "모든 가정이 이런 줄 알고" 부모의 요구를 따르려 애썼다. 열심히 공부하고 세심히 동생을 돌봤다. 그 와중에 학교 운동부 코치에게 하키 실력을 인정받아 선수 생활을 한다면 대학 진학을 도와주겠다는 제안까지 받았다. 민서 양은 '내가 대학 가기를 원하는 부모님이 좋아하겠다'는 생각에 집에서 하키 선수를 하고 싶다는 말을 꺼냈다. 그러자 부모는 "고작 그런 이야기를 하려고 날 불렀느냐"며 민서 양을 호되게 혼냈다. 중학생 민서 양이 어떤 일에도 의지를 갖지 못하기 시작한 순간이다.
한창 무력감을 느끼던 민서 양은 코로나 시기 온라인을 통해 친해진 이들에게 집안 사정을 털어놓고 나서야 자신이 학대를 당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와 게임 등지에서 사귄 친구들은 "도대체 어떻게 해야 부모님을 기쁘게 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는 민서 양의 하소연을 이상하게 여겼다. 폭행 이야기를 듣고 나서는 "이건 신고를 해도 될 정도"라며 걱정하기 시작했다. 온라인상 지인들이 말해주는 평범한 가정은 "다른 세상, 드라마에서나 보던 집"이었고, 그제야 민서 양은 자신의 집에서 벌어지는 폭력과 크게 다르지 않은 사건들을 아동학대라고 부르는 뉴스들이 눈에 보였다.
이때부터 민서 양은 자신을 무력하게 만드는 환경을 바꾸려 부단히 애썼다. 중학교 3학년이던 그는 쉴 곳을 마련해주겠다는 친구를 만나러 생전 처음 제주도로 떠났다. 낡은 건물에서 변변찮은 끼니로 버틴 일주일이었지만 집에서 폭력을 겪지 않아도 된다는 것만으로도 전에 없이 행복한 순간이었다. 집에 돌아온 뒤에는 학교에 가정사와 그로 인한 학교생활의 어려움을 전부 털어놓았다. 분노한 부모가 집안 방문을 떼고 민서 양의 일거수일투족을 통제할 때에는 친구에게 아동학대 신고를 부탁했다. 어머니는 민서 양이 폭행과 폭언을 기록하려 카메라를 들고 나서야 학대를 멈췄다.
그러나 아동학대를 적극적으로 막아야 할 사회 시스템은 민서 양의 용기를 뒷받침하지 못했다. 경찰은 제주도로 떠난 민서 양에게 거처를 마련해준 친구를 처벌할 수 있다며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고, 아동보호전문기관은 "죽을 만큼의 위협이나 중증의 상해가 없으니 처벌이 어렵다. 그 정도 다툼이면 집에 있어도 된다"며 민서 양을 집에 머물게 했다. 아동학대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의 권유로 민서 양을 맡은 친척들은 "옛날 시대엔 때리는 게 당연했으니 네가 어머니를 이해하라"는 말만 반복했다. 친척들은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한 민서 양이 자해를 시도하자 "애가 폭력적이라 감당이 안 된다"며 집에서 쫓아냈다.
위기청소년 보호가 목적인 청소년 쉼터도 제 기능을 못하긴 마찬가지였다. 충청권에 위치한 이 쉼터는 가정폭력 후유증으로 학업에 어려움을 겪는 민서 양을 독려하기보다 "너는 너무 끈기가 없어", "핑계만 대지 말고 그냥 해"라며 꾸짖기 바빴다.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을 하는 입소자들에게는 "쉼터에서 쫓아내겠다"는 말을 일삼았는데, 한 입소자가 공황 증세로 숨을 못 쉬어 구급차를 부르자 "밤중에 구급차를 부르는 건 민폐"라며 같은 일이 반복되면 퇴소시키겠다고 협박하는 식이었다.
답답함을 느낀 민서 양은 청소년상담센터 온라인 상담에서 자신이 처한 상황을 말하며 어떻게 행동하면 좋을지 조언을 구했고, 이로부터 며칠 뒤 쉼터에서 쫓겨났다. 상담 기록을 전달받은 지자체가 쉼터를 질책하는 과정서 민서 양을 언급했기 때문이다. 이때 민서 양이 가진 돈은 6만7000원이 전부였다. 도저히 거처를 구할 수 없던 민서 양은 마지막 동아줄을 붙잡는 심정으로 청소년 지원체계가 가장 발달해 있다는 서울로 발걸음을 옮겼다.

문제 해결 과정을 함께하는 나무…혼자서 모든 일을 짊어져야 한다는 가치관이 바뀌었다
서울에 도착한 민서 양은 청소년 지원단체가 운영하는 일시쉼터에 머물면서 자신이 받을 수 있는 복지 제도를 수소문했다. 심리, 의료, 자립, 주거 등 산적한 제도 중에서 자신에게 적합한 것들을 찾아 신청하는 건 16세 위기청소년 민서 양이 혼자 해내기 어려운 작업이었다. 이때 민서 양의 손을 잡은 기관이 지원 분야를 가리지 않고 10대 여성이 처한 위기를 해결하는 데에만 집중하는 십대여성일시지원센터 '나무'다.
"나무는 어떤 도움을 직접 준다기보다는 제가 처한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을 함께해주는 기관이에요. 다른 기관의 인턴십 프로그램에서 마찰이 생기면 나무 활동가들과 함께 풀고요. 월세지원금이 생겨 원룸으로 이사할 때에는 부동산 방문부터 살 집을 알아보고, 계약서를 쓰고, 이삿짐을 나르는 것까지 나무가 전부 도와줬어요. 아동복지기구에서 하는 의료비 지원사업도 나무와 같이 신청해어떤 치료를 받을지 고민 중이고, 9월쯤엔 한국토지주택공사 주택지원을 신청하려 하는데 이것도 나무랑 같이 준비할 것 같아요."
민서 양은 나무를 만나 생긴 가장 큰 변화를 묻자 "혼자서 모든 걸 짊어져야 한다는 가치관이 바뀌었다"고 답했다. 가정과 쉼터에서는 어른들의 타박을 피하려고 마음껏 울어보지도, 화내지도 못했다. 하지만 나무에서는어떤 어려움을 토로해도 위로를 건네고 함께 대안을 찾아나갈 동료들이 있었다. 10대 청소년이 고민을 털어놓고 도움을 받는 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지만, 민서 양과 같은 위기청소년들에게는 나무가 아니고서는 좀처럼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나무는 내밀한 이야기를 터놓고 말할 친구들을 사귈 수 있는 공간이기도 했다. 이전까지 민서 양이 쉼터에서 만난 청소년들은 같은 공간에서 밥을 먹더라도 별다른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쉼터 종사자들이 공부를 잘하거나 말을 잘 듣는 청소년들에게 더 많은 지원을 제공했는데, 이 과정에서 위계질서가 생기고 서로를 경쟁 상대로 보면서 속사정을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나무는 청소년별 위기와 그에 필요한 지원을 탐색하는 공간이어서 서로 경쟁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청소년끼리 자신이 처한 현실을 쉽게 털어놓을 수 있었고, 대화를 통해 서로를 깊게 이해하는 친구가 될 수 있었다.
감정을 표현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란 걸, 힘든 과정도 뜻이 맞는 동료가 있다면 더 쉽고 즐겁게 해결해 나갈 수 있다는 걸 깨닫자 스스로를 돌볼 여유도 생겼다. 자신을 타인에게 드러내는 것이 약점이 된다고 여겨 무료 심리검사마저 피했던 민서 양은 이제 심리검사를 통해 잘 알지 못했던 자아를 발견하는 데 재미를 붙였다. 뿐만 아니라 일과 학업, 취미 활동을 병행하면서 진로를 고민하고 있다. 고민이 커지면 찾을 곳은 당연히 나무다.

"이용자 목소리 반영 안된 기관 의미 없어…위기청소년 계속 생길 것"
"나무가 끝나기 전에 최대한 많이 가야겠어요." 인터뷰를 마무리할 때쯤 긴장이 풀린 민서 양이 한숨을 내쉬며 한 말이다. 이제 막 자립을 시작한 민서 양은 지금도 고민이 생길 때면 나무부터 찾지만, 내년부터는 그럴 수 없게 됐다. 나무가 위탁 기간이 끝나는 올해를 마지막으로 운영을 종료하기 때문이다.
지난해 서울시와 서울시의회는 나무의 민간위탁 기간을 기존 3년에서 1년으로 줄이며 청소년일시쉼터, 청소년교육센터 등과 기능이 중복된다고 지적했다. 서울시는 자체 평가를 통해 나무를 쉼터 등 기능이 비슷한 다른 기관과 통폐합하라고 권고했으며, 서울시의회도 기능 통폐합을 언급하며 중복기능과 통합지원체계 검토를 통해 대안을 마련하라고 했다.
그러나 제주부터 서울까지 떠돌며 쉼터를 비롯한 여러 청소년 기관을 다녀본 민서 양의 경험은 서울시와 서울시의회의 지적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주거, 교육 등 물질적 혜택을 제공하는 기관들과 문제 해결 과정을 동행하는 나무는 별개의 성격을 띠고 있다. 통폐합이 가능할 정도로 기능이 중복됐다면 민서 양이 쉼터를 전전하다 나무에 찾아올 일도, 청소년교육기관과 나무를 함께 다닐 일도 없었다.
"청소년들의 목소리를 듣지 않으면서 만드는 기관은 아무 의미 없어요. 새 기관을 만들더라도 위기청소년들은 계속 생길 거예요. 제가 잘 모르는 그들만의 큰 계획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지만 적어도 지금 여기 남은 위기청소년들은 이 공간을 잃어버린 거예요."
위기여성청소년 지원기관의 향방에 이용자의 목소리가 반영돼야 한다는 민서 양의 바람은 나무에 의지하던 많은 10대 여성들, 나무에 앞서 지난 4일 운영을 종료한 십대여성건강센터 '나는봄'에서 일상을 회복하던 위기 10대 여성들의 공통된 바람이다. 서울시는 오는 2026년 위기청소년의 조기발견부터 회복과 자립까지 통합 지원을 수행하는 대규모 센터를 출범한다고 밝혔으나, 개소 전 위기청소년들의 의견을 청취하겠다는 계획은 아직 발표한 바 없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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