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펠린 비행장과 가까운 S반 프랑큰스타디온(Frankenstadion)역에서 열차를 타고 뉘른베르크 중앙역으로 돌아왔다. 중앙역은 보유한 선로와 승강장에 비춰보면 크지 않았지만 역사 안 시설은 백화점처럼 깨끗했다. 밥 먹는 시간이라도 아끼기 위해 역사 안 푸드 코너에서 야채와 햄이 들어있는 바케트 빵을 사서 역 출입구 한 편 낮은 계단에 앉아 끼니를 때웠다. 이제 지하철 U반을 탈 차례이다. 중앙역 안에 지하철 역으로 연결된 에스컬레이터가 있다. 1호선을 타고 다섯 정거장을 가서 뷔한샨스(bärenschanze) 역에 내렸다. 역 북서쪽 출구로 나가 한 블록, 4분 정도 걷다가 오른쪽으로 꺾어 들어가면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 기념관이 나온다.
연합군은 2차 세계대전 승리 후 전쟁범죄 처리를 위한 두 곳의 국제군사재판소를 열었다. 하나는 도쿄 전범 재판이라고도 불리는 극동국제군사재판소이고 다른 하나는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소였다. 뉘른베르크 재판은 1945년 11월 20일 시작돼 1946년 10월 1일까지 진행됐다. 매년 전당대회가 열려 나치에 열광했던 땅이 종전 후 나치 심판의 장소가 됐다. 무고한 사람을 죽음으로 내몬 군인, 정치인, 기업인, 어용노조지도자, 언론인 등 24인이 기소됐다.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소는 재판을 앞두고 급히 보수 됐다. 전쟁 말기 연합군은 독일의 주요 도시를 공습했고 뉘른베르크도 예외는 아니었다. 도시는 폭격으로 폐허가 돼 있었다. 당시 자료화면을 보면 헌병들이 지키는 재판소 입구에서 시내로 이어진 도로 양편은 무너진 돌 더미가 나뒹굴고 있었다. 전범재판소는 대형 감옥을 보유한 뉘른베르크 지방법원이자 고등법원, 검찰청이 법조타운을 이룬 곳에 위치했다. 폭격 피해도 크지 않아 건물이 온전히 보존돼 있었다. 전범 재판이 열렸던 600호 법정에서는 2020년 2월까지 일반 재판이 진행됐다.
큰 도로에서 법원 건물로 들어서는 골목 입구에는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을 주관한 승전국 4개국의 깃발이 담긴 대형 입간판이 서 있다. 이중 미국, 영국, 프랑스와 달리 지금은 사라진 소련(소비에트 연방공화국)의 낫과 망치가 그려진 붉은 깃발이 눈에 들어왔다. 2차 세계대전에서 가장 많은 인명피해를 본 국가는 소련이었다. 러시아 국방부는 1993년, 옛 소비에트 과학아카데미의 연구를 바탕으로 870여만 명의 군인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발표했다.
학자들은 실종된 포로까지 포함하면 1000만 명이 넘을 것으로 추정한다. 민간인까지 포함하면 2700만 명이 전쟁 중 사망했다고 한다. 미국 40만, 영국 41만, 프랑스 50~60만 명에 비교하면 소련의 전쟁 희생자 규모는 엄청나다. 한국에서는 2차대전 승전에 가장 큰 기여를 한 국가는 미국으로 여기지만 역사가들은 소련을 꼽는다. 소비에트 연방공화국이 막대한 피해를 감수하며 동부전선에서 독일군을 소진시키지 않았다면 1945년의 종전은 장담할 수 없었다.
7.5유로를 내고 입장권을 받아 2층으로 올라갔다. 2층에는 뉘른베르크 재판 과정을 담은 사진들이 전시된 공간이 있고 맞은편에는 유명한 600호 법정이 있다. 바로 전범 재판이 열렸던 현장이다. 사진과 영화로 여러 차례 보아서 낯이 익은 공간이었지만 막상 현장에 서자 가슴속에서 숙연한 감정이 올라왔다. 뉘른베르크 재판정은 역사 다큐멘터리에서나 볼 수 있는 막연히 먼 시공간이었다. 그러나 우연한 기회에 또는 마침내, 아니면 기어이 역사적 현장에 도착했다. 600호 법정은 전범 재판 당시의 모습을 구현하고 있었다. 정중앙 벽 앞에는 재판장과 재판관들이 앉았던 단상이, 왼쪽에는 피고인석이 있다. 중앙 공간 1인용 의자들이 놓인 곳은 재판 당시 통역사들과 속기사들이 긴 책상을 앞에 두고 일했던 공간이다.
피고인석 맨 끝자리가 눈에 들어왔다. 독일공군 루프트바페 총사령관 헤르만 괴링이 앉아있던 자리다. 두바이발 프랑크푸르트행 비행기 안에서 본 영화 <뉘른베르크>의 여러 장면들이 생각났다. 기념관 전시실에는 괴링이 재판받는 장면이 담긴 사진이 전시돼 있다. 사진 속 괴링은 검은 선글라스를 끼고 통역용 헤드폰을 머리에 쓴 채 어깨를 한쪽으로 기댄 거만한 자세로 앉아 있다. 단호하게 다문 입은 몰락한 제국이지만 최고 장성의 위엄을 잃지 않겠다는 각오처럼 보인다.
국제군사재판 검사들은 △평화에 반한 죄의 달성을 위한 음모에 참여한 죄, △침략전쟁을 비롯한 각종 평화에 반한 죄를 계획, 개시 및 전개한 죄, △전쟁범죄, △인도에 반한 죄 등 4가지 항목으로 피고인들을 기소했다. 기소된 24명 중 무혐의로 석방되거나 재판 전 자살한 5명을 제외한 피고인들은 위 항목들의 일부 또는 전부에 대해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중에서도 괴링은 모든 항목에 대해 유죄가 인정됐고 사형을 언도받았다.
전범 재판에서든 내란 재판에서든 얼굴을 당당히 들고 하늘 아래 부끄럼이 없다고 주장하는 피고인들을 보면 현기증이 난다. 극단적 아집에 갇혀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들, 보통 사람들의 상처와 고통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사람들이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자리를 꿰찰 때 시민들의 생존 공간은 언제든지 비극의 땅으로 변할 수 있다.
전범재판기념관을 나와 뷔한샨스역을 향해 걸었다. 걷는 거리 이름은 퓌르트(Fürth)거리이다. 퓌르트는 뉘른베르크옆 도시이다. 뉘른베르크 중앙 요충지인 플레러(Plärrer)역 로터리에서 퓌르트로 향하는 뉘른베르크의 길을 퓌르트거리로 명했고 반대로 퓌르트시에 도착하면 이어진 길이 뉘른베르크 거리로 변한다. 하나로 이어진 거리를 두 도시가 서로 상대 도시 이름으로 바꿔서 지명한 셈이다. 독일 최초의 철도는 바로 이 뉘른베르크 – 퓌르트 구간에서 시작됐다.
1825년 영국에서 세계 최초로 철도가 등장하고 1830년 리버플-맨체스터간 철도가 신세계를 열었다는 소식은 온 유럽으로 퍼져갔다. 여러 나라들이 앞다투어 철도를 놓기 시작했다. 벨기에는 발 빠르게 움직였다. 국왕 레오폴드가 진두지휘한 철도건설은 벨기에를 강소국으로 견인하는 밑거름이 됐다. 철도 열풍은 독일에도 전파됐다. 독일 남부 바바리아의 군주 루트비히 왕은 영국에 철도 조사단을 파견할 정도로 새로운 기계문명에 관심을 쏟았다. 그러나 철도보다 운하에 관심이 많았던 왕은 곧 흥미를 잃었다. 대신 바바리아의 기업가들이 나섰다. 조지 플래트너와 요하네스 샤러는 132,000 길더를 모아 뉘른베르크-퓌르트 철도회사를 설립했다.
1935년 12월 7일, 개통식에 왕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사업가들은 루트비히 군주의 이름을 따서 새 철도를 루트비히스반으로 불렀다. 바바리아 왕국에서 통행량이 가장 많은 6킬로미터 길이의 철길은 바바리아의 최고 명물이 됐다.
궤도는 영국이 채용한 표준궤를 택했다. 유럽의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독일 철도가 표준궤로 시작하면서 철도의 전 유럽 철도 호환성의 기틀이 마련된 셈이다. 영국에서 기관차가 수입됐고 특별히 스카웃한 기관사 월리엄 윌슨이 운전을 맡았다. 독수리란 뜻인 ‘아들러’라는 이름을 가진 증기기관차가 뉘른베르크와 퓌르트 구간을 달렸다. 초기 루트비히스반 철도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한 시간 간격으로 운행됐는데 기관차와 기관사가 부족했던 탓에 대부분의 열차는 말이 끌었다. 새로 도입한 증기기관차 아들러호는 오후 1시와 2시 딱 두 번 운행됐다. 뉘른베르크 역 주변에는 점심 식사를 마친 사람들이 오후 1시에 맞춰 떠나는 불을 뿜는 강철 괴물을 보기 위해 몰려들었다.
뷔한샨스 지하철역을 향하면서 역이름을 번역기로 돌려보니 곰의 굴이란 뜻으로 나왔다. 곰의 굴 승강장에서 두 정거장을 가면 플래러 역이 나오고 여기서 2호선으로 환승해 한 정거장을 가면 오페라 하우스 역이다. 이 역에서 내려 오페라 하우스와 나란히 서 있는 건물의 출입구를 찾으면 독일철도공사가 운영하는 뉘른베르크 철도박물관이 나온다. 입장료는 10유로인데 당일 사용한 열차표를 보여주면 8유로로 2유로를 할인해 준다. DB앱을 열어 사용한 승차권의 큐알코드를 보여주고 할인된 입장권을 샀다.
리버플-맨체스터 구간의 기관사였던 윌슨은 뉘른베르크가 맘에 들었다. 하지만 바바리아의 법에 따르면 외부 사람은 하루 이상 바바리아에 머무를 수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바바리아를 찾았다가 다시 떠나야 했다. 이런 이상한 법 때문에 철도에 승객들이 몰렸다. 원래 맥주와 신문 수송 목적의 루트비히스반 철도가 화물 대신 여객 수송으로 짭짤한 수익을 올리게 됐다.
루트비히스반 철도 등장 후 철도를 보는 독일 사람들의 생각이 달라졌다. 이어서 라히프치히-드레스덴 철도가 개통되고 여기저기서 거미줄처럼 철도망이 뻗어 나갔다.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리스트는 철도가 분열된 독일 왕국들을 꿰매는 실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1850년부터 1870년 사이 독일 철도망은 세 배나 늘어났다. 철도망이 늘어났다는 것은 독일 경제가 그만큼 급속하게 성장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석탄, 철, 직물 생산이 증가했고 수공업은 공장제 대공업으로 대체됐다. 철도 산업 자체가 철과, 석탄 생산의 확산과 기계공업의 발달을 불러왔다. 생산력이 확대되자 정치적 변화를 이끄는 요인이 됐다.
박물관은 철도에 반쯤 미쳐있는 나를 황홀케 했다. 최초의 철도 루트히스반시절의 기관차, 귀족을 위한 초호화 객차, 증기기관차의 거대한 쇠바퀴, 시대별 철도 차량과 자료, 사진들이 빼곡히 들어있는 공간은 마냥 심장을 뛰게 했다. 권위주의, 민주주의, 파시즘의 공간 속을 열차는 달렸다. 왕이 탔던 객차와 1848년 혁명을 질주했던 사람들, 철도 공사 현장에서 노동자에 둘러싸인 히틀러의 사진도 보였다. 철도원, 역, 철도 도구와 장비들, 객화차, 철도 광고들이 전시관 복도를 수놓았다. 정신을 쏙 빼앗긴 채 돌다가 마주한 기념품 판매 코너에서 반가운 책을 만났다. 한국에서 <기차다고 세계 여행>이라는 이름으로 출간된 그림책이다. 한국어판을 감수했기에 여러 차례 꼼꼼히 읽었던 터여서 친구를 이역만리에서 우연히 만난 기분이 들었다.
독일의 여러 왕국 중 가장 세력이 큰 프로이센의 주도로 새로운 경제체제가 만들어졌다. 프로이센은 내부의 독립 소국이나 독일 북부에서 남부에 이르는 여러 국가와의 경제동맹체제로 관세동맹을 맺었다. 상품을 수송하는 데 있어 경제구역을 넘을 때마다 부과되는 관세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파생시킬 수밖에 없는 조건이었다. 바이에른과 뷔르템베르크에 이어 작센, 하노버, 브룬슈비크 등은 이미 관세동맹을 맺고 있었다.
철도는 이전과 다른 더 큰 구역과 규모의 경제체제를 요구했다. 프로이센은 이들 크고 작은 관세동맹을 모두 모아 독일관세동맹을 만들어 하나의 단일 경제단위로 묶어냈다. 모두 18개의 나라가 이 울타리 안으로 들어갔다. 독일연방의 기초가 태동하게 됐다. 철도는 독일 통일을 견인하는 인프라였다. 프로이센의 총리 비스마르크는 이 같은 독일 연방을 구축하는 여정에서 특유의 능력을 발휘했다. 이때 프로이센과 경쟁 관계에 있던 합스부르크가의 오스트리아가 떨어져 나갔다.
한국인들에게 각인된 독일 혹은 독일인은 근면함, 정확함, 기술 강국, 라인강의 기적, 선진국, 분데스리가 축구, 맥주 같은 것이다. 이런 것들은 독일 민족의 강인함 속에 발현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독일이라는 근대 민족국가가 등장하기까지, 고난에 찬 민족사를 뚫고 민족의 정체성을 확립해 온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게르만족은 중부 유럽에 넓게 퍼져있었다. 그들은 지역에 따라 파생된 독일어를 기초로 한 방언을 구사하며 공동체를 이루어 살았다. 북쪽으로는 발트해와 중부의 산악지대, 남부로 내려오면 알프스를 낀 오스트리아와 스위스가 모두 독일이라고 부를 수 있는 지역이었다.
나치처럼 민족국가의 우산 아래 모여들기를 바라는 권력과 이들의 구미에 맞게 역사를 재단해주는 학자들에겐 실체이겠지만, 광대한 지역에서 하나의 민족적 정체성이나 소속감을 유지 시켰다는 것은 환상이다. 1648년 베스트팔렌조약에 의해 최종적으로 독일에서 탈출한 스위스나 신성로마제국에서 독일의 기초가 됐던 오스트리아를 빼고서라도 독일은 여러 도시국가와 지역 공동체가 어울리고 경쟁하는 곳이었다.
1871년이 돼서야 비로소 독일 제국이 성립된다. 파리 코뮌을 진압하고 베르사유 궁전에 모인 독일 공국의 제후들은 프로이센의 빌헬름 1세에게 통일 독일의 왕관을 씌워 주었다. 빌헬름 1세 아래에서 비스마르크는 날개를 달았다. 철도는 더 확대돼 독일 제국을 단단히 옭아맸다. 경제는 뜨거운 용광로처럼 활활 타올랐다. 통일된 대제국 독일은 거침없이 들판을 달리는 철마와 같이 전쟁과 홀로코스트의 검은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던 근대를 달렸다.
독일철도의 새장을 열었던 루트히스반은 1922년 9월 31일을 마지막으로 운행을 중단했다. 퓌르트에 있던 역사는 1938년 철거됐다. 나치 당원들의 행진 광장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철도로 제국을 통일하고 근대의 문을 연 독일은 극우 민족주의 열광 속에 파시즘으로 내달렸다.
뉘른베르크 철도박물관을 나와 중앙역을 향해 걸었다. 맑은 하늘 아래 평화롭게만 보이는 도시의 풍경과 품었던 역사가 도무지 연결이 되지 않았다. 더 보고 싶은 곳들이 있었지만 프랑크푸르트에서의 약속을 위해 열차를 타야 했다. 30분 차이로 가격이 크게 달라져 오후 2시 59분 출발하는 열차표를 예매했다. 승강장에 도착해 의자에 앉아 긴 도보에 지친 다리를 쉬게 했다. 얼마 안 가 하얀색 고속열차 이체가 들어왔다. 승객들이 출입문으로 모여들었다. 좋은 좌석을 차지하기 위해 그 틈에 끼어들었다. 열차는 곧 출발했다. 빈자리를 골라 앉은 뒤에야 철도박물관 기념품 숍에서 산 짤즈부르크–도르트문트간 IC열차 객차용 행선표를 뉘른베르크 역 승강장 의자에 두고 온 것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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