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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러 패권 흔들" 베이징서 포옹한 중·러…'단층선' 위 한국에 날아든 청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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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러 패권 흔들" 베이징서 포옹한 중·러…'단층선' 위 한국에 날아든 청구서

[원동욱의 외교광장] 베이징의 판짜기, 안동의 생존법

2026년 5월 19일, 세계 외교의 거대한 두 무대가 동아시아에서 동시에 막을 올렸다.

한 곳은 중국 베이징이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탄 '에어포스 원'이 수도국제공항을 떠난 지 불과 나흘 만에,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댜오위타이(釣魚臺) 국빈관에 여장을 풀었다. 언론 매체들이 일제히 주목한 대로, 중국이 미·러 정상을 같은 달에 연이어 맞이하는 것은 사상 유례없는 일이다. 베이징은 명실상부한 '세계의 접견실'이자 새로운 국제 질서의 설계국(局)으로 자리매김했다.

같은 날, 또 다른 무대는 대한민국 경북 안동이었다. 이재명 대통령은 자신의 고향으로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를 초청해 한일 정상회담을 가졌다. 양국의 화합을 상징하는 만찬이 차려졌고, 두 정상은 회담 후 고택 인근을 산책하며 신뢰를 다졌다.

베이징과 안동. 이 두 장면을 나란히 놓으면 오늘의 세계 질서와 동아시아 지정학이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지, 그리고 그 거대한 파고 속에서 중견국들이 어떻게 생존을 도모하고 있는지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한쪽에서는 'G2'가 주도하는 세계 질서의 다음 판(板)이 짜이고 있고, 다른 쪽에서는 그 판 위에서 살아남기 위한 중견국들의 조용한 연대가 다듬어지고 있다.

1. 타이밍이 곧 메시지다: 시진핑 외교의 문법

외교에서 일정은 결코 우연의 산물이 아니다. 치밀한 형식과 상징을 중시하는 중국 외교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트럼프 미 대통령이 베이징을 떠난 지 나흘 만에 푸틴이 도착했다는 이 타이밍 하나가 그 어떤 장황한 분석보다 강렬한 메시지를 던진다. 이번 푸틴 러시아 대통령 방중의 공식 명분은 '중·러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 수립 30주년' 및 '선린우호협력조약 체결 25주년'이다. 그러나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이 연례적 기념일을 트럼프 방중 직후로 정밀하게 배치함으로써 세계를 향해 세 가지 다층적 메시지를 발신했다.

*첫째, 미국의 전략적 레버리지를 선제적으로 차단했다 . 트럼프 행정부가 과거 닉슨식 외교를 모방해 '중·러 분열(Divide and Rule)'을 미·중 빅딜의 지렛대로 활용하려 했다면, 시진핑은 미국의 퇴장 직후 푸틴을 안방으로 불러들임으로써 그 구상을 정면으로 무력화했다. 베이징이 워싱턴의 눈치를 보며 전략적 선택을 주저하지 않는다는 단호한 선언이자, 미국의 압박이 강해질수록 중·러의 밀착은 더욱 공고해질 수밖에 없다는 경고다.

*둘째, 베이징이 국제 정치의 중심축이자 다극화 질서의 구심점임을 과시했다 . 5월 한 달간 트럼프와 푸틴이라는 양대 축을 시작으로, 유럽 내 대표적 친중·친러 국가인 세르비아의 부치치 대통령, 그리고 미·이란 전쟁 국면에서 핵심 중재자로 떠오른 파키스탄의 샤리프 총리가 연이어 베이징의 문을 두드린다. 미국 중심의 일방주의에 맞서 세력 전이를 꾀하는 서방 외곽 체제와 '글로벌 사우스'의 거두들이 일제히 시진핑 주석의 안방으로 모여들고 있는 것이다.

*셋째, 유라시아 블록의 실질적인 진영 간 '전략적 정렬(Strategic Alignment)'을 단행했다 . 단순히 친선을 도모하는 자리가 아니라, 전면전으로 치닫는 중동발 에너지·물류 위기 속에서 유라시아 대륙 세력의 공동 대응 시나리오를 완성하겠다는 포석이다. 트럼프와의 연쇄 회담을 통해 파악한 미국의 속내와 협상 카드를 러시아·파키스탄 등 우방국들과 실시간으로 공유하며, 가속화되는 글로벌 복합 위기 국면에서 주도권을 쥐겠다는 정교한 계산이 깔려 있다.

미국과 악수하고, 나흘 뒤 러시아와 포옹한다. 실용과 명분을 극대화하는 시진핑 외교의 핵심 문법이 바로 여기에 있다.

2. 30년의 우정, 그 이면에 숨겨진 '철저한 이해타산'

중국 외교부는 중·러 관계를 '영구선린우호(永久睦邻友好), 전면적 전략협력(全面战略协作), 호혜협력공영(互利合作共赢)'이라는 화려한 수사로 포장한다. 그러나 이 아름다운 외교적 수사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양국 관계는 '철저한 이해타산'이 교차하는 지정학적 거래로 해석된다.

이번 회담에서 양국은 오랜 난제였던 '시베리아의 힘 2' 가스 파이프라인 구축에 관한 법적 구속력 있는 각서에 합의했다. 협상력의 무게추는 중국으로 급격히 기울어 있다.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유럽 시장을 잃은 러시아에 중국은 사실상 유일한 대규모 가스 수출 창구다. 러시아는 목이 마르고, 중국은 여유롭게 가격을 깎는 형국이었기에 지난 10년간 타결되지 못했던 협상이다.

그러나 이란 전쟁이 판도를 바꿨다. 중동의 호르무즈 해협이 봉쇄 위기에 직면하자 중국은 에너지 안보 차원에서 러시아산 가스의 전략적 가치를 재평가했다. 중국 정부가 차기 '15차 5개년 계획' 요강에 러시아 연결 신규 가스관 건설을 포함시킨 배경이다. 중동의 위기가 시베리아 가스관의 숨통을 틔워준 셈이다.

군사 분야의 밀착은 더욱 의미심장하다. 시진핑은 이번 회담을 통해 원자력 추진 잠수함 건조 기술, 탄도미사일 방어(BMD), 드론전 및 수중전 등 러시아의 첨단 군사 기술과 '우크라이나 전장 데이터'를 요구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러시아에게는 소모전이지만, 중국에게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첨단 현대전을 학습하는 '살아있는 교범'인 셈이다. 전쟁은 러시아가 치르고, 핵심 데이터는 중국이 내재화하는 구조다.

3. 1972년 닉슨과 2026년 트럼프의 결정적 차이: 미·중·러 삼각방정식의 역전

트럼프의 이번 방중을 두고 외신은 1972년 리처드 닉슨의 역사적 베이징 방문을 앞다투어 소환했다. 당시 닉슨은 '중·소 분열'이라는 지정학적 균열을 파고들어 크렘린을 고립시켰고, 미·중·소 삼각관계의 주도권을 워싱턴으로 가져오며 냉전의 지형을 통째로 뒤흔들었다. 트럼프 역시 이번에 중국에 전략적 타협을 제안함으로써, 고착화된 '중·러 연대'의 고리를 끊어내고 미국의 단극 패권을 수호하려는 대담한 '2026년판 닉슨 독트린'을 구상했을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였다. 1972년의 전략은 대성공을 거두었으나, 2026년의 구상은 철저한 실패로 귀결되었다. 워싱턴이 간과한 것은 지난 반세기 동안 미·중·러 삼각방정식의 축축한 토양이 완전히 뒤바뀌었다는 시대적 지형의 차이다. 과거 중국은 소련의 군사적 위협에 밀려 미국이라는 생존의 밧줄을 잡아야 했지만, 지금의 중국은 러시아의 자원과 영토를 완벽하게 배후지로 흡수한 경제·기술 강국이다. 이제 삼각관계의 레버리지는 미국이 아닌 중국의 손에 쥐어져 있다.

결정적인 패착은 미국의 무기화된 달러 패권이 낳은 역설에 있다. 미국이 서방 중심의 강력한 금융 제재를 가할수록, 역설적으로 중·러 간 위안화 결제 비중은 2022년 이전 2% 미만에서 현재 70% 이상으로 급등했다. 미국의 제재가 중·러로 하여금 달러망을 우회하는 강력한 '대체 생태계'를 건설하도록 촉진한 셈이다. 물론 이는 달러 패권을 단번에 무너뜨리는 전면전이 아니다. 서서히, 그러나 돌이킬 수 없게 미국의 금융 지배력을 녹아내리게 만드는 지정학적 '침식'이다.

동남아, 중동, 중남미를 아우르는 '글로벌 사우스'가 이 거대한 우회로에 본격적으로 탑승하기 시작하는 순간, 미국의 패권적 기반은 흔들릴 수밖에 없다. 트럼프가 베이징에서 빈손으로 돌아간 지 나흘 만에 시진핑과 푸틴이 포옹할 수 있었던 공고한 신뢰의 배경에는, 이처럼 미국이 스스로 제공한 '달러 없는 유라시아 블록'이라는 거대한 이해관계의 일치가 자리 잡고 있다.

4. 안동의 셔틀 외교: 거대 블록의 틈새를 파고드는 중견국 생존 다변화

베이징에서 유라시아 블록의 거대한 판이 짜이던 같은 날, 대한민국 경북 안동에서는 한일 정상회담이 개최되었다. 강대국 일방주의의 거센 파고 속에서 열린 이번 회담은 격변하는 동아시아 정세에 대응해 양국의 연대와 셔틀 외교를 공고히 하기 위한 지극히 실리적이고 방어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특히 이재명 대통령이 자신의 고향인 안동으로 다카이치 총리를 맞이한 것은 지난 1월 이 대통령의 일본 나라현 방문에 대한 답방이다. 이처럼 과거사나 국내 정치적 부침에 흔들리지 않고 단절 없는 셔틀 외교의 리듬감을 유지하는 것 자체가, 작금의 복합 위기 속에서 한국 외교가 확보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외교적 안전판이자 신뢰 구축의 증거이다.

오늘날 국제 정세는 강대국들이 자국 이익에 따라 진영을 가르고 핵심 공급망을 무기화하는 거대한 조류 속에 있다. 이러한 다극화·블록화 국면에서 한국이나 일본 같은 중견국(Middle Power)이 단독으로 초강대국들의 외교적·경제적 압박을 견뎌내거나 흐름을 바꾸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나 유사한 안보·경제적 딜레마와 지정학적 리스크를 공유하는 핵심 중견국들이 서로 손을 잡고 독자적인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플랫폼’을 구축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양국의 긴밀한 협력 체계는 거대 강대국 블록 사이에서 일방적으로 끌려 다니지 않고, 중견국으로서의 협상력 and 외교적 자율성을 극대화하는 생존 전략이 된다.

이번 안동 회담에서 두 정상이 도출해낸 구체적 합의들은 이러한 중견국 연대의 실효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양국은 중동 전쟁으로 촉발된 호르무즈 해협 봉쇄 가능성에 주목하고, 이에 따른 에너지 수급 불안과 글로벌 공급망 위기에 공동 대응하기로 뜻을 모았다. 이와 동시에 조세이 탄광 유해 발굴 등 오랜 기간 평행선을 달리던 민감한 역사적 현안에 대해서도 정치적 공방을 배제하고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차근차근 풀어나가기로 합의했다. 이는 복잡한 안보·경제적 위기 관리와 풀기 어려운 과거사 문제를 투트랙(Two-Track)으로 분리하여 접근하는 성숙한 외교 기조의 정착을 의미한다.

결과적으로 베이징의 외교가 세력권을 획정하고 패권을 다투는 '고래들의 거친 힘겨루기'라면, 안동의 외교는 그 거대 블록의 틈새를 파고들어 생존과 번영의 공간을 넓히려는 중견국들의 조용하고도 치밀한 전략적 연대다. 비록 초강대국들이 주도하는 거대 담론에 비해 외견상 규모의 크기는 비견할 수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자국 실리를 극대화하고 지정학적 고립을 탈피하려는 안동 셔틀 외교의 방향성은 현 국제 질서에서 가장 현실적이며, 중견국 한국이 걸어가야 할 지극히 올바른 외교적 이정표를 제시하고 있다.

5. 한국 외교의 과제: 복합 위기의 전면화, '행동하는 레버리지'를 구축하라

트럼프와 시진핑의 회담에서 한반도 문제는 중동의 전운과 우크라이나 사태에 밀려 원론적인 수준의 의제로 취급되는 데 그쳤다. 강대국들의 거대 흥정판에서 주변국의 이해관계는 대개 본질적인 의제가 아니라 타협을 위한 종속변수이자 교환 매물로 전락하기 마련이다. 잔혹하게도 지금 대한민국은 판 위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유라시아 블록 and 해양 세력이 거칠게 충돌하는 '판과 판 사이'의 단층선에 위태롭게 비껴서 있다. 중·러가 에너지·위안화 블록을 강화할수록 우리의 공급망은 흔들리고, 미·중이 그들만의 전략적 안정에 합의하면 한반도의 운명 역시 우리가 배제된 채 그들의 조건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스스로 의제를 설정하고 실질적인 지렛대를 확보하지 못하면 다가올 청구서를 감당할 수 없다. 다행히 한국에게는 반도체, 배터리, 조선, 방산이라는 강대국조차 침묵시킬 수 있는 독보적인 '기술적 불가결성'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 자산들을 서랍 속에 묻어둔 채 눈치 보기 외교만 반복한다면 전략적 효용은 사라진다. 이제는 이 기술 자산을 누구와, 어떤 타이밍에, 어느 수준으로 연대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행동 패키지'를 가동해야 한다.

*첫째, 한일 연대를 단순한 외교적 상징을 넘어 그 범위를 넓혀 '중견국 경제·안보 상설 협의체'로 제도화해야 한다. 중동발 에너지 위기에 대응해 한일 공동 원유 비축 물량을 상호 융통하는 메커니즘을 구축하고, 해상 물류 마비에 대비한 대체 항로(예컨대 북극항로 및 유라시아 육로 연결망 등)의 다변화 전략을 일본·글로벌 사우스와 공동으로 설계해야 한다.

*둘째, 핵심 광물과 반도체 공급망에서 '기술 통제력의 제도화'가 필요하다. 미·중·러가 독점할 수 없는 우리만의 핵심 공정 기술을 무기로, 강대국의 일방적인 공급망 재편 요구에 공동으로 제동을 걸 수 있는 카르텔성 협상력을 키워야 한다. 과거사의 무게를 엄중히 인식하면서도, 생존을 위한 실용주의적 공조를 끌어내는 정교한 투트랙 외교가 절실한 시점이다.

베이징의 화려한 만찬은 끝났고, 그들이 쓴 독소적인 규칙의 청구서는 이미 우리를 향해 날아오기 시작했다. 안동의 담론 역시 밥상 위에서 끝나서는 안 된다. 이제 남은 과제는 안동에서 나눈 실리적 합의들을 거친 국제 정치의 역학 관계 속에서 중견국들에게 통용될 정교하고 치명적인 '외교의 언어'이자 '실행 계획'으로 빠르게 번역해 내는 일이다.

▲ 베이징에서 정상회담을 가진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주석 ⓒ EPA=연합뉴스

원동욱

원동욱은 동아시아 국제정치와 중국 연구를 전문으로 하는 학자이자 공공 지식인으로, 현재 사단법인 외교광장 부이사장을 맡고 있다. 2010년부터 동아대학교 국제대학 중국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교육과 연구를 병행해왔다. 한국교통연구원 책임연구원,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상임위원, 제23대 한국현대중국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중국 정치와 외교, 미중 전략경쟁, 동아시아 질서를 연구하며, 주요 매체 기고와 사회대개혁지식네트워크 운영위원장 활동을 통해 공공 지식인으로서 사회참여를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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