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봄, 영국에서 『반헌법행위자열전』 3권을 펼쳤다. 안우만(安又萬, 1937~) 항목에서 한 줄이 눈에 박혔다.
"서울 형사지법 항소8부(재판장 부장판사 안우만)는 긴급조치 위반 사건 재판을 담당했는데 여기에는 후에 대법원장으로 재직하면서 사법농단의 주역이 된 양승태가 좌배석 판사로 참여했다."
안우만(1937~)과 양승태(1948~). 두 사람이 같은 재판부에서 긴급조치 위반 사건을 처리했다. 재판장과 배석판사로. 그리고 두 사람은 나란히 『반헌법행위자열전』에 이름을 올렸다. 이 짧은 한 줄이 한국 사법역사의 어두운 연속성을 압축한다.
1937년 경남 울산 출생, 큰형은 월북, 막내는 법관
안우만은 1937년 2월 14일 경상남도 울산에서 순흥 안씨 집안의 막내로 태어났다. 포목상을 운영한 아버지의 셋째 아들이었다. 큰형 홍만은 해방 후 월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사실이 나중에 그의 출세경로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기록에 없지만, 월북한 형을 둔 막내가 어떻게 처신했을지는 짐작할 수 있다.
1956년 경남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경남고는 김영삼(1927~2015)과 문재인(1953~) 두 대통령을 배출한 학교다. 이 PK 인맥이 나중에 안우만의 출세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 1956년 서울법대에 입학했고 동기 중 장관급을 지낸 인물만 12명에 달했다. 이수성(국무총리), 정해창(대통령 비서실장), 윤영철(헌법재판소장), 최상엽(법무부장관) 등. 그 화려한 기수에서 안우만도 대법관과 법무부장관에 올랐다.
세계사 속의 동류, 체제에 오른 '출세 법관'들
영국에서 이 장면을 들여다보면 비슷한 구조가 떠오른다. 나치독일의 법관들 중 일부는 체제에 부역하는 대가로 빠른 승진을 보장받았다. 그들의 공통점은 신념보다 출세를 선택했다는 것이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는 이를 "판단을 거부하는 것"이라 했다. 스스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을 멈추고, 체제가 요구하는 것을 수행하는 것.
소련의 법관들 중에도 비슷한 유형이 있었다. 재판의 결론을 미리 알고 법률적 외양을 입히는 역할을 맡은 사람들이다. 안우만의 경우 더 복잡한 것은, 그가 완전히 나쁜 판결만 내린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크리스찬아카데미 사건에서 유화적 판결을 내리기도 했다. 그 복잡함이 그를 단순한 악인이 아닌 '체제의 산물'로 만든다.
1967년 장준하 사건, 광복군 출신을 실형에 처하다
안우만의 반헌법 행위의 첫 번째 장면은 1967년이다. 장준하(1918~1975)는 광복군 출신으로 일제 만주군 출신 박정희(1917~1979)의 비판자였다. 1966년 10월 대구강연에서 "밀수의 왕초는 바로 박정희 씨다", "존슨 대통령이 내한하는 것은 한국청년의 피가 더 필요해서 오는 것이다"라는 발언을 해 명예훼손으로 구속 기소됐다.
장준하는 박정희를 증인으로 신청했다. 재판장 안우만은 이를 기각했다. 1967년 2월 28일 안우만은 "헌법에 보장된 언론자유는 실정법에서 제한을 받고 있기 때문에 비록 정치인의 정치적 발언이라 해도 이를 무제한 허용할 수 없다"며 징역 6개월 실형을 선고했다.
『반헌법행위자열전』은 이 판결을 이렇게 평가한다.
"광복군 출신으로 일본의 괴뢰 만주군 출신의 박정희에 대해 비판적이던 장준하가 삼성의 밀수사건을 계기로 박정희 대통령을 비판한 것을 명예훼손으로 처벌했는데 정치판결이 아닐 수 없었다. 이 판결은 안우만의 정치적 성향을 드러낸 것이자 그가 정치판사로 나아가게 되는 출발점이었다고 볼 수 있다."
긴급조치 재판들, 술자리 발언도 징역 1년 6개월
1975~1977년 대전지법과 서울형사지법에서 안우만이 처리한 긴급조치 사건들의 목록을 보면 섬뜩하다.
"자유당도 무너졌는데 공화당은 얼마나 갈 것이냐"고 말한 노동자, 징역 1년.
"박정희 도당, 때려죽인다"고 술자리에서 말한 사람, 징역 1년 6개월.
"물가가 오르고 국민생활이 곤란한데 박 대통령이 그만두어야 살기가 나을 것이다"라고 말한 사람, 징역 1년.
"유정회는 잡동회다"라고 말한 사람, 징역 6개월.
상갓집에서 "박정희가 무엇인데"라고 말한 농민, 징역 1년 6개월.
이 목록이 끝이 아니다. 안우만 재판부의 좌배석에는 양승태가 있었다. 1977년 수도여자사범대학 학생 이혜경 사건(징역 1년), 향린교회 청년회장 인태선 사건(징역 3년). 『반헌법행위자열전』은 담담하게 기록한다.
"이 사건들에는 후에 대법원장으로 재직하면서 사법농단의 주역이 된 양승태가 좌배석 판사로 참여했다."
현대아파트 특혜분양, 265명 중 1명으로 이름 올려
안우만의 이력에 묘한 장면이 하나 있다. 1978년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특혜분양 사건에서 265명의 특혜분양자 명단에 안우만의 이름이 포함됐다. 판사신분으로 재벌아파트 특혜분양을 받은 것이다. 검찰은 이 사건에서 법관들을 특별 배려해 자술서만 제출토록 했다. 안우만은 형사 처벌도, 이렇다 할 불이익도 받지 않았다.
재벌로부터 특혜를 받은 판사가 긴급조치로 시민들을 처벌했다. 이 이중성이 안우만이라는 인물을 상징한다.
서울형사지법 수석부장, 건국대 사태의 무더기 영장
1983년 서울형사지법 수석부장판사가 된 안우만은 5공 공안통치의 핵심법원 자리에 앉았다. 형사지법원장 김형기(1929~2023), 수석부장 안우만 체제가 전두환 정권의 공안사건 재판을 총괄했다.
1986년 형사지법원장으로 재직하던 당시 건국대 사태에서 무더기 영장을 발부했다. 수석부장 손진곤(1941~)이 1,288명의 구속영장을 발부할 수 있었던 것은 형사지법원장 안우만이 그 위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법관 퇴임 후 헌법재판소장 좌절, PK 카드는 통하지 않았다
1988년 대법관에 임명됐다. 1991년 대법관으로서 전두환의 처남 이창석에게 보석을 선고해 "대표적인 정치판사"로 다시 논란의 중심에 섰다.
1993년 소장판사들의 사법부개혁 요구에 "정치판사는 있을 수도 없고 있지도 않다"고 반발했으나 법원행정처장에서는 물러났다.
1994년 대법관 퇴임 후 헌법재판소장에 내정됐다. 그런데 법원내부와 법조계, 시민사회의 강력한 반발로 좌절됐다. 대신 김영삼 정권은 경남고 PK 인맥을 활용해 안우만을 법무부장관에 임명했다.
법무부장관 시절 노태우 비자금 사건이 불거지면서 김영삼의 대선자금 문제도 연결됐다. 안우만은 이를 유야무야 묻어버렸다. 정치판사가 정치적 법무장관으로 마무리된 것이다.
영국에서 2026년을 생각한다
영국에서 나치시대 법관들에 대한 기록은 이렇게 정리된다.
"그들은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몰랐다고 할 수 없다."
안우만도 알고 있었다. 장준하를 실형에 처하면서, 술자리 발언에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하면서, 그가 무엇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대가로 빠른 승진과 대법관 자리를 얻었다.
2024년 12월 3일 윤석열(1960~)의 비상계엄 선포를 영국에서 생중계로 보며 나는 안우만의 재판부에서 배석판사로 긴급조치 사건을 처리하던 양승태를 떠올렸다. 그 양승태가 나중에 대법원장이 돼 재판을 권력과 거래했고, 그 구조가 2024년 12월 3일 밤까지 이어졌다. 『반헌법행위자열전』이 안우만과 양승태를 같은 책에 수록한 이유가 거기 있다.
역사의 법정에는 공소시효가 없다. 그리고 그 법정의 방청석에는 우리가 앉아 있다.
참고문헌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원회, 2026, 『반헌법행위자열전 1-4』, 사회평론아카데미.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