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피해자의 아들이 연좌제를 피해 살아남은 대가
2026년 봄, 영국에서 『반헌법행위자열전』 2권을 펼쳤다. 이영범(李永範, 1941~) 항목을 읽다가 한 문장에 오래 멈췄다. 안기부의 '신원 특이사항' 보고서에 이런 내용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영범의 아버지 이홍무는 "해방 후 남로당에 입당해 보도연맹원으로 활동하다가 6·25 당시 국군에 의해 처형됐다." 그리고 이영범은 "어떤 이유인지 알 수는 없지만 연좌제를 피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한 대목이 이영범이라는 인물을 이해하는 열쇠다. 보도연맹으로 처형당한 아버지를 둔 아들이 판사가 됐다. 그 아들이 이근안(1941~2026)이 고문으로 조작한 사건에서 최을호, 김영희, 김진모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그리고 그 세 명은 1986년 5월 27일 같은 날 사형이 집행됐다. 조작간첩 피해자로는 마지막 사형집행이었고, 모두 이영범이 1심에서 판결한 사람들이었다.
1941년 경북 문경 출생, 연좌제의 그늘 아래서
이영범은 1941년 2월 경상북도 문경에서 태어났다. 1959년 문경고등학교(현 문경공고)를 졸업하고 서울법대에 입학해 재학 중이던 1962년 8월 제15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했다. 고시 동기로는 가재환(1940~2025), 이철환, 정상학, 문호철(1937~1978) 등이 있는데 이들 모두 나란히 『반헌법행위자열전』에 이름을 올렸다.
당시 판검사 임용에는 엄격한 신원조회가 있었다. 보도연맹으로 처형당한 아버지를 둔 아들이 판사가 됐다는 것이 놀랍다. 『반헌법행위자열전』은 "어떤 이유인지 알 수는 없다"고 적었다. 그 '어떤 이유'가 무엇이었는지를 우리는 알 수 없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이영범은 그 '어떤 이유'로 연좌제를 피했고, 판사가 됐고, 그 자리에서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세계사 속의 동류, '운신의 폭이 좁을 수밖에 없는' 법관들
영국에서 이 장면을 들여다보면 역설적인 구조가 떠오른다. 나치독일에서 유대인 혼혈 법관들 중 일부는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체제에 협력해 살아남은 경우가 있었다. 자신의 취약한 위치를 의식하면서 더 열심히 충성경쟁을 한 것이다.
이영범의 상황도 구조적으로 비슷하다. 안기부가 그의 아버지 경력을 알고 있었다. '신원 특이사항'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영범이 어떤 심리였을지를 역사학자 한홍구 교수는 이렇게 분석한다.
"이영범으로서는 운신의 폭이 좁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분석이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같은 시기 일부 판사들은 그럼에도 무죄를 선고하고 옷을 벗었다. '운신의 폭이 좁았다'는 것이 사형을 선고한 이유를 완전히 설명하지는 않는다.
1975년 한승헌 변호사 필화사건, 수필 한 편으로 1년 6개월
이영범의 반헌법 행위의 첫 번째 장면은 1975년이다. '시국사건 1호 변호사' 한승헌은 1972년 『여성동아』에 「어떤 조사(弔辭)」라는 수필을 실었다. 사형제도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담은 글이었다. 그런데 검찰은 3년이 지난 뒤 이 수필이 간첩죄로 사형당한 사람에게 애도를 표한 것이라며 반공법으로 구속기소했다. 한승헌이 이일재, 민청련, 김지하의 변호인을 맡아 정권의 눈에 밉보였기 때문이었다.
1심 판사 이영범은 1975년 9월 11일 징역 1년 6개월 실형을 선고했다. 소설가 안수길, 유주현, 문학평론가 이어령이 법정에 나와 수필의 문학적 의미를 증언했고, 변호인단이 기피신청까지 냈지만, 이영범은 유죄를 선고했다. 2017년 재심에서 무죄가 선고됐다. 42년 만이었다.
1982~1983년, 사형 판결의 연속
이영범이 서울형사지법 합의13부 재판장으로 있던 1982~1983년, 그의 법정에서 나온 사형판결들이 이 글의 핵심이다.
1982년 10월 7일, 서독 광부취업 후 북한에 포섭됐다는 혐의로 기소된 김진모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1982년 12월 24일, 안기부가 고문으로 조작한 송씨 일가 간첩단사건에서 송지섭·송기준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1983년 2월 23일, 조총련 간첩사건에서 26세 젊은 여성 김영희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그리고 1983년 3월 16일, 이근안이 40여 일 불법 구금해 고문으로 조작한 김제 가족간첩단사건에서 최을호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이근안이 만든 공소장에는 1000원 짜리 지폐로 공작금을 받았다는 내용이 있었는데, 한국은행이 1000원 지폐를 처음 발행한 것이 1975년이었다. 범행 연도인 1966년에는 1000원 지폐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엉터리 증거임에도 이영범 재판부는 그대로 사형을 선고했다.
송지섭과 송기준은 상급심에서 감형돼 사형을 모면했다. 그러나 김진모, 김영희, 최을호는 달랐다. 1986년 5월 27일, 세 사람은 같은 날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됐다. 국가보안법에 의한 조작간첩 피해자들로서는 마지막 사형집행이었다. 모두 1심에서 이영범이 판결한 사람들이었다.
피해자의 조카 최낙전은 풀려났지만 경찰의 집요한 보안관찰 감시를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세상을 하직했다. 또 다른 조카 최낙교는 서울구치소에서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됐다. 2017년 재심에서 무죄가 선고됐지만, 법원은 "국가가 범한 과오에 대해 진정으로 용서를 구한다"고 했다. 피해자들은 이미 이 세상에 없었다.
"따뜻한 눈빛"으로 경청했지만, 피해자의 증언
『반헌법행위자열전』에 인상적인 장면이 하나 있다. 송씨 일가 간첩단 사건 피해자 송기수가 국정원 과거사위원회 면담에서 이렇게 말했다.
"당시 재판장이었던 이영범 부장판사가 동정적인 눈빛으로 높은 법대 위에서 몸을 앞으로 수그려가며 자신들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일곱 번 재판을 받는 동안 가장 따뜻한 눈빛이었다."
그리고 덧붙였다.
"나름대로 고민한 판결이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가장 따뜻한 눈빛을 가진 재판장이, 고문으로 조작된 사건에서 사형을 선고했다. 이것이 이영범 이야기의 가장 비극적인 지점이다. 따뜻한 눈빛과 잔인한 판결이 공존했다. 그 공존을 가능하게 한 것이 "운신의 폭이 좁을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는 분석이 맞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분석이 억울하게 죽은 세 명을 살리지는 못한다.
이중 잣대, 안기부 요원에게는 집행유예
1994년, 안기부 요원의 흑색선전물 살포사건이 이영범의 재판부에 왔다. 안기부 요원들이 불법으로 흑색선전물을 살포한 사건이었다. 이영범은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간첩조작사건에서는 엉터리 증거로도 사형을 선고하고, 안기부 요원의 불법행위에는 집행유예를 선고한 것이다. 이중 잣대라는 말이 이보다 더 잘 어울리는 사례가 있을까.
영국에서 2026년을 생각한다
영국에서 길퍼드 4인 사건의 피해자들이 재심에서 무죄를 받았을 때, 정부는 공식사과하고 수사관들에 대한 책임추궁이 이루어졌다. 판사가 엉터리 증거를 토대로 사형을 선고했다면, 그 판사의 책임도 추궁했을 것이다.
한국에서 이영범은 대전지방법원장, 광주고등법원장을 지내고 퇴직 후 경찰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2019년에는 운강이강년의병대장기념사업회 회장이 됐다. 독립운동가를 기리는 단체의 장이 됐다. 그리고 그가 사형을 선고해 집행된 세 명의 재심무죄는 2017년에야 선고됐다.
2024년 12월 3일 윤석열(1960~)의 비상계엄 선포를 영국에서 생중계로 보며 나는 이영범을 떠올렸다. 국가폭력의 피해자를 아버지로 둔 아들이 같은 구조의 피해자에게 가차 없이 사형을 선고한 것. 그 비극이 제대로 청산되지 않은 채 이어져 온 것이 2024년 12월 3일 밤의 배경이었다.
역사의 법정에는 공소시효가 없다. 그리고 그 법정의 방청석에는 우리가 앉아 있다.
참고문헌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원회, 2026, 『반헌법행위자열전 1-4』, 사회평론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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