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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되는 '홍명보 선임', 이유 없는 이탈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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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반복되는 '홍명보 선임', 이유 없는 이탈은 없다

[기고] '홍명보 사태'를 통해 본 교육과 정치

해제

홍명보 감독은 북중미 월드컵 32강 진출 실패 이후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2024년 여름의 선임 논란, 그해 9월 상암에서 울려퍼진 "홍명보 나가" 구호는 성적에 대한 분노가 아니었다. 팬들은 이미 선임 과정의 불합리함, 협회 운영의 공백을 보고 있었다.

지금도 우리 사회 곳곳에서는 '홍명보 선임'이 반복되고 있다. 지금의 복잡한 사회문제 앞에서 약한 고리를 찾아 끊어야 할 때, 기성세대 결정권자들은 자주 익숙한 이름과 낡은 방식으로 돌아간다. 그 위에는 축구의 라볼피아나, 교육의 논서술형 평가 같은 새 포장이 얹힌다. 그러나 포장지의 무늬가 달라져도 낡은 것이 새로워지지는 않는다. 현장의 당사자들은 변화가 싫어서 투정을 부리는 것이 아니다. 그저 결정권자들이 자신들의 문제를 정말로 이해하는지, 또 변화의 구호가 정말로 변화로 돌아오는지를 확신하지 못할 뿐이다.

이 글의 대부분은 월드컵 이전 시점인 2025년 말에 썼다. 다만 당시의 판단을 큰 틀에서 남기고, 현재 시점에서 사안을 다시 바라보는 차원의 결론만을 붙였다. 중요한 것은 당시 분석의 적중 여부가 아니라, 결과가 나오기 전부터 이 결정의 정당성이 이미 깊이 흔들리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정치 뉴스를 챙겨 보는 사람들은 매일 쏟아지는 현안에 익숙하다. 지지율 등락, 프레임 싸움, 검찰 수사, 국회 공방은 눈앞에서 움직인다. 반면 교육 같은 사회정책 의제는 평소에 여론을 곧장 흔들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자주 뒤로 밀린다. 그러나 좋은 말만 있고, 책임지는 사람이 없으면 괴리는 조용히 쌓인다.

조국 사태와 인천공항 논란, 의사 진료거부와 청년 세대의 이탈은 그렇게 쌓인 질문이 뒤늦게 표면으로 올라온 사건이었을 뿐이다. 현장의 질문은 기성세대의 원론 앞에서 무색해졌고, 괴리는 조금씩 불신이 된다. 축구장에서는 그 감정이 "나가"라는 구호가 되고, 선거에서는 표가 말없이 빠진다. 이유 없는 이탈은 없다. 이 흐름을, 2017년부터 시간순으로 따라가 보자.

▲2026 북중미 월드컵 32강 진출에 실패해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에서 사퇴한 홍명보 전 감독이 입국하는 30일 인천국제공항 제2여객터미널을 찾은 팬들이 항의 현수막을 들어올리고 있다. ⓒ연합뉴스

타임라인

2017년 5월 문재인 정권이 출범했다.

2017년 7월 김상곤 전 경기교육감이 문재인 정권 초대 교육부장관으로 취임했다. 수능 절대평가를 확대하겠다고 밝혔으나, 8월 여론의 반발을 우려한 청와대가 개입하면서 개편안이 1년 미뤄졌다.

2018년 공론화위원회로 넘어간 대입제도 개편은 사실상 결정 없이 끝났고, 김상곤 장관이 경질됐다.

2019년 조국 사태로 정시 확대 여론이 폭발했다. 대입제도공정성강화방안이 나와 주요 16개 대학에 정시 40% 이상이 권고됐다. 자사고·외고 폐지 방침 발표 직후 대치동 집값이 석 달 만에 4억 가까이 올랐다.

2020년 인천공항 정규직 전환 논란으로 '공정' 담론이 떠오르고, 의대정원 확대와 공공의대 설립에 반대해 의사와 전공의들이 진료를 거부했다. 정부와 의사가 합의해 의대 증원과 공공의대 신설이 중단됐다.

2021년 4·7 보궐선거에서 여당이 서울 18%p, 부산 28%p 차이로 참패했다.

2022년 대선에서 이재명 후보가 윤석열 후보에게 0.73%p 차로 패배하며 정권이 교체됐다.

교육을 방치하자 격차가 벌어졌고, 그 불만이 조국 사태에서 터졌다.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만이 방치가 아니다. 공교육 강화, 경쟁교육 극복, 주입식 교육 탈피 같은 말은 계속 있었다. 문제는 그 말들이 실제 교실과 대입 현장에서 어떻게 작동할지, 어느 지역, 어느 계층의 학생이 비용을 지게 될지, 사교육 시장이 그 틈을 어떻게 다시 메울지에 대한 답이 따라오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기회는 평등할 것입니다'라는 구호와 실제 결과의 괴리는 조국 사태와 인천공항의 '공정' 담론, 부동산 대책의 실패, 2030 세대의 이탈로 이어졌다. 교육이 윤석열을 불러온 셈이다.

복잡한 사안을 왜 이해해야 하는가

과거 한국축구를 두고 상투적으로 등장하던 표현이 있다. '골 결정력 부족', '수비 집중력 부족'. 그런데 펩 과르디올라 감독의 등장 이후, 경기장 공간을 일정한 방식으로 분할하고 그 위에서 경기 중 드러난 전술을 디테일까지 하나하나 뜯어보는 문화가 자리 잡았다. 프로팀이 쓰던 분석 도구를 대중도 어느 정도 향유하게 되었고, xG(기대득점) 같은 지표가 나오면서 사람들은 경기를 더 체계적으로 읽게 됐다.

늘 큰 경기 후반마다 높은 집중력을 보이는 공격수들이 있다. 코치들과 경기분석팀은 노하우와 데이터를 동원해, 특정 시점에 체력이 빠진 상대 수비수의 스프린트 속도가 얼마나 줄어드는지를 계산한다. 레알 마드리드나 맨체스터 시티 같은 정상급 팀의 로드리, 크로스 같은 미드필더들이 경기장 반대편으로 길게 이어지는 전환 패스를 반복하며 경기의 템포를 조절한다.

그러면 힘을 아끼던 음바페와 홀란드 같은 세계적 공격수들은 지친 수비수들 사이를 딱 적당한 순간에, 예상된 길, 계산된 출력으로 파고든다. 그들이 매번 '초인적인 골 결정력'을 보여 주고, 상대 수비수들이 '집중력이 부족'해 보이는 것은, 우연이 아닌 설계의 결과다.

이렇게 읽으면 대응의 방식도 다르게 보인다. 수비수의 집중력을 탓하는 것은 교육으로 치면 '킬러문항을 내지 말자'는 수준이다. 한 단계 나아가면, 상대 빌드업의 원천을 찾게 된다. 2023년 정부가 '수능 킬러문항' 문제의 원인으로 '사교육 카르텔'을 지목하고, 시대인재·메가스터디 같은 대형 사교육 업체에 세무조사를 들이댄 것은 이 차원의 대응이었다.

그러나 로드리를 직접 압박한다고 맨체스터 시티의 중원 빌드업이 무너지는가? 과르디올라의 시스템에서 로드리는 축이지만, 곧 시스템 전체는 아니다. 로드리가 빠지면 코바치치가 내려오고, 베르나르두 실바와 포든 같은 2선 자원이 빈 공간을 다시 채운다. 스톤스처럼 센터백과 미드필더의 경계를 오가는 선수가 들어오면, 질문의 방법부터 바꿔야 한다. 빌드업의 출발점을 따지는 일 자체가 무의미해지기 때문이다.

결국 시대인재 학원을 세무조사하고 부당이득을 추징해 봐야 메가스터디와 대성학원이 있고, 그들까지 제재해도 다른 학원, 다른 강사가 그 역할을 대신할 뿐이다. 실제로 2023년 '빅3' 모두가 세무조사를 받아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사교육의 역량이 미래탐구 같은 논술학원, 이감이나 이해원 같은 연구실, 수많은 개인과외와 소규모 학원까지 시장 전체에 분산되어 있기 때문이다.

킬러문항을 배제했다는 2024학년도 수능은 역대급 '불수능'이 되었고, 만점자와 전국 수석은 하필 이권 카르텔로 지목된 해당 학원 출신이었다. 사교육비 총액은 그 이후 매번 역대 최대치를 경신하고 있다.

결국 상대의 빌드업 시스템 전체를 이해하고 약한 고리를 끊지 않으면, 우리의 '골 결정력과 수비 집중력 부족'은 나아지기 어렵다. 현대 사회의 정책을 둘러싼 사안과 쟁점들은 그만큼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세부 하나라도 바꾸려면 전체 구조를 꿰고 있어야 한다. 그러지 못한 채 로드리 앞의 수비수가 아무리 활동량을 늘려 봐야, 더 빠른 체력 소진과 더 확실한 패배만 남는다.

대한축구협회는 홍명보 감독을 선임하며 '원팀 정신', '원스피릿', '헌신과 희생'을 내세웠고, 결과가 좋지 않게 끝나면 여전히 '골 결정력 부족', '수비 집중력 문제'가 거론된다. 물론 이임생 기술총괄이사는 동시에 감독 선임의 이유를, "라볼피아나를 활용한 빌드업과 비대칭 3백 시스템을 바탕으로 후방에서 안정적으로 경기를 전개하는 데 강점을 갖고 있다. 또한 전진 패스를 통한 프로그레션과 상대 수비 뒷공간 공략에 능하며, 선수들의 장점을 극대화해 공격 지역에서는 라인 브레이킹을 이끌어낸다."며 설명하기도 했다.

축구협회도 낡은 개념에만 안주하는 대신, 미시적 수준까지 경기를 분석하는 최근 전술 트렌드를 받아들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 설명에 담긴 정보는 그리 많지 않다. 후방에서 공을 전개하고 측면을 이용하며 뒷공간을 노린다는 말은, 공격도 수비도 두루 잘하는 감독을 골랐다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왜 하필 홍명보였는지, 그 결정을 누가, 어떤 방식으로 내렸는지에 대한 답으로는 충분하다 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이제 라볼피아나 자체는 새로울 것이 없다. 수비형 미드필더가 센터백 사이로 내려와 빌드업을 돕는 움직임은 이미 현대 프로팀의 기본 전술이다. 앞서가는 팀들은 반대로 센터백이 미드필더처럼 전진하고, 측면의 선수와 서로 자리를 바꾸며, 상대의 압박 방향에 따라 빌드업의 출발점을 계속 옮기기도 한다. 이제 축구를 가볍게 보는 팬조차도 라볼피아나 자체보다 그것을 어떻게 변형하는지, 플랜A가 막혔을 때 무엇을 할지, 한 선수에게 부담이 몰리지 않도록 선수단을 어떻게 짤지를 묻는다.

교육도 마찬가지다. 문해력과 연산력 확보를 통한 기초학력의 회복처럼 그럴듯한 제언도, 어느 학교에 어떻게 교사와 시수를 배분하고 어떤 수업과 평가로 이를 구현할지를 말하지 않으면, 그저 허울일 뿐이다.

전문가의 정책에 당사자들이 매번 반발하는 것은, 우리 사회 곳곳에서 반복되는 '홍명보 선임'에 대한 반작용이기도 하다. 그들은 제도권이 독점하던 진단과 당사자로서의 감각 사이의 간격을 절감하며, 결정권자가 정말로 사안을 이해했는지를 묻고 있을 뿐이다.

좌초된 수능 절대평가, 청와대의 개입

2017년 6월 김상곤 전 경기도교육감이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장관 후보로 지명됐다. 혁신학교와 친환경 무상급식을 주도했던 인물로, 문재인 정부 교육정책의 방향을 상징하는 인선이었다. 그는 7월 임명 직후 수능 절대평가 확대를 포함한 대입제도 개편 의지를 밝혔고, 8월 2021학년도 수능 개편 시안을 발표했다.

수능 절대평가 전환은 문재인 후보의 대선 공약이었고, 캠프 내 교육정책 인사들 사이에서 광범위한 합의가 있던 사안이었다. 이는 장관의 독단적인 결정이 아니었다. 그러나 불과 3주 후, 교육부는 개편안 발표를 1년 유예하기로 결정했다. 전격적인 번복의 배후에는 청와대의 개입이 있던 것으로 알려졌다.

정권 스스로가 임명한 사회부총리의 핵심 정책이 부임 두 달 만에 좌초했다. 정권 초기에 교육정책을 정할 통로 하나를 스스로 막은 셈이다. 자원이 가장 풍부한 시기에 교육부의 추진력이 꺾였고, 이후 부처는 능동적 개혁보다 지표 관리와 사고 예방에 매달리는 태도로 돌아섰다.

이후 교육정책은 아무도 책임지지 않으려 하는 사안이 흔히 빠지는 경로를 밟았다. 이듬해 대입제도 개편 과제는 교육부에서 국가교육회의로, 다시 3개월간 20억 원을 들여, '정시 확대안과 절대평가 전환안의 지지율 차이가 통계적으로 유의미하지 않다'는 결과를 낸 공론화위원회로 넘어갔다. 결국 제2외국어와 한문만 절대평가로 바꾸고 나머지는 지금의 제도를 유지하기로 하면서, 중장기 방향성은 언급에서 아예 빠졌다. 결국 2018년 8월 말 김상곤 장관은 경질됐다.

정무적 판단으로 특정 정책의 추진을 멈추는 것 자체는 선출직 정치권력의 정당한 권한이다. 교육학적 관점에서 절대평가 자체의 타당성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교육과정을 충실히 이해했는지는 상대적 서열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원론의 타당성과 특정 시점의 수능 전면 절대평가 전환은 다른 문제다. 필자는 당시 수능 절대평가 전면 전환 공약이 무책임했다고 보고, 지금도 여건이 갖춰졌다고 보지 않는다. 그러나 정책을 멈추기로 했으면, 대안은 있어야 했다. 시간만 흘려보내는 사이, 격차는 더 벌어지기만 했다.

『수능 해킹』에서 분석한 지역별 수능 1등급 학생의 비중을 보면, 2010년대 초반까지 완만히 늘던 서울과 그 외 지역의 격차가 2010년대 후반 들어 급격히 벌어진다. 수학 가형은 서울 학생의 1등급 비율이 서울 외 지역의 1.6배에서 3배, 국어는 1.1배에서 2배로 커졌고, 2018년 이후 격차는 더 가파르게 확대된다.

정책이 멈춘 시기와 격차가 빠르게 벌어진 시기가 겹친다. 이는 사실 과거부터 누적된 사교육 고도화의 결과에 가까웠다. 그러나 현상을 감지하지 못한 이상, 정권은 책임을 떠안을 수밖에 없었다.

실물과의 괴리, 청년 세대의 이탈

리버럴은 격차 완화와 포용을 말했지만, 실제 정책은 현상유지와 위기관리에 머물렀다. 그들이 진심으로 격차를 문제로 느꼈는지, 의도가 순수했는지는 부차적이다. 정치인은 지지층에게 믿어달라는 말을 할 수는 있어도, 유권자를 한 명씩 만나 진의를 설명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자신의 선의를 대중을 향한 호소의 근거로 삼는 이들은, 공론장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어야 한다는 민주정치의 원칙을 잊은 것이다.

유권자는 '기회는 평등할 것입니다, 과정은 공정할 것입니다'라는 말에서 현실에서 커지기만 하는 대입 결과의 격차를 떠올린다. 이 괴리는 여론조사 문항을 아무리 잘 설계해도 잡히지 않는다. 유권자 스스로도 자신의 감정과 동기를 분명한 말로 옮기지 못하기 때문이다.

정책의 취지와 시민이 체감하는 현실의 차이만으로도 표는 빠진다. 이는 공직자가 도덕적으로 옳아야 한다는 당위 이전에, 현실과 구호가 유리되면 지지자는 이탈한다는 경험적 산술의 문제다. 결국 지지율 수치가 아닌 세부지표를, 광장과 골목의 정서를, 그리고 사안이 터졌을 때는 시민의 실제 삶을 봐야만 한다.

그 괴리는 조국 사태나 인천공항 논란처럼 이름 붙은 사건에서만 나타나지 않는다. 진보교육계의 정책과 이상이 교실의 일상에 들어오는 과정에서도 쌓인다. 평범한 가정의 학부모, 지방 일반고 학생으로서 사교육 없이는 대입을 준비하기 어렵다 호소하면 돌아오는 답은 대체로 공교육 강화, 수능 절대평가와 논서술형 전환이다. 그러나 그들이 묻고 싶었던 것은 애초에 원론의 방향이 아니었다.

절대평가로 전환하면 변별 압력은 어디로 이동하는가. 논서술형 문항은 실제로 사고를 평가하는가, 아니면 풀이과정을 외워 쓰는 단답형 문항이나 다를 바가 없는가. 왜 공교육 강화를 외치면서도 교사를 더 뽑고 부담을 나눠 지는 대신 외부 업체, 연구용역, 시범사업의 목록만 늘어나는가. 왜 하필 그 업체와 자문위원, 누군가의 동문이 매번 뽑히는가. 무엇보다, 그 모든 것을 왜 현장과 한마디 상의 없이 자기들끼리 정하는가.

그러나 취지와 원론만을 말하는 결정권자들에게, 이런 질문은 미래교육의 비전을 거부하고, 주입식 교육을 옹호하는 시대착오적 목소리로 치부될 뿐이다.

조국 사태나 4·7 재보선처럼 이탈이 예고 없이 터지는 날, 정치인과 종편 분석가들은 이를 설명하기 어려운 천재지변으로 여긴다. 그러나 청년 세대가 등을 돌린 이유, 정시 확대 여론이 솟구친 이유를 조국 사태나 부동산 정책 실패만으로 보면 무언가가 부족하다. 그들은 특정 정책 하나보다, 자신들의 의문이 매번 다른 '좋은 말'로 덮이는 장면 자체에서 불만을 느낀다. 무의식적, 비언어적으로 쌓여 온 그 불만은 분노보다 느리게 쌓이지만 훨씬 오래 가고, 분노가 드러난 시점이면 대응하기에 이미 늦다.

인천공항 정규직 전환 논란도 같은 맥락이다. 여론조사를 연령·직업별로 교차 분석하면 뜻밖의 양상이 나타난다. 정책의 수혜 대상이 될, 20대 비정규직 집단에서 반발이 터진 것이다. 이들은 이미 대입 경쟁에서 '기회의 평등'이 허구라는 것을 체감한 세대였고, 그 경험 때문에 '공정' 사안에 더 날카롭게 반응했다.

이에 더해, 2019년 정부는 풍선효과를 따지지 않고 자사고·외고 폐지 방침을 내놓았다. 서울시교육청이 자사고 8개교의 지정을 취소하자 학교들이 소송을 제기했고, 2021년까지 전원이 1심에서 승소했는데도 교육부는 별다른 대응 없이 시행령 개정으로 2025년 일괄 전환을 밀어붙였다. 정책의 정당성과는 별개로, 추진 과정에서 절차적 정합성을 갖추지 못한 채 법적 분쟁만 남긴 셈이다.

강남 학원가의 학부모와 학생들은 고교·대입정책 변화에 따라 영재고, 자사고, 역내 일반고 등 가장 유리해 보이는 학교를 찾아 옮겨 다닌다. 유리함을 누리는 근본 원인을 그대로 둔 채 정시 대신 학생부종합전형을, 자사고 대신 일반고를 밀어 봐야 물건을 왼쪽 주머니에서 오른쪽 주머니로 옮기는 꼴이다.

이 장면에서 학생과 학부모가 본 것은 정책의 방향이 아닌, 결정이 내려오는 방식이었다. 왜 그 순서였는지, 왜 법적 분쟁을 감수하며 밀어붙였는지, 변화에 적응하는 비용은 누구에게 돌아가는지, 전환이 무산되는 경우 책임은 누가 지는지를 물어도 답하는 이는 없었다. 결정권자는 결론은 그대로 둔 채 현장을 설득의 대상으로만 본다. 자기 삶이 걸린 문제를 상의 없이 통보받고, 정책이 바뀔 때마다 적응에 대한 값을 치르는 쪽은 늘 정보와 자원이 부족한 강남 외 지역이었다.

그 사이 '강남 8학군 부활' 우려가 들끓었다. 2017년부터 쏟아낸 28번의 부동산 대책이란 사실상 전부 LTV, DTI 같은 일시적 수요 억제책이었다. 강남 집값이 뛰는 기저 원인인 교육 불평등을 건드리는 대신 표면의 거래만 틀어막는다고 가격이 잡힐 리가 없다. 결국 모든 실패는 집값 상승과 여론의 이반으로 귀결되었다.

교육·대입 정책을 손댄다고 부동산 시세가 바로 잡히지는 않았겠지만, 적어도 정권이 실상을 정확히 알고 대응한다는 신호를 줬다면, 그 자체가 집값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또 여론조사에서 '정부가 노력하고 있다고 보느냐'와 '정책이 효과가 있다고 보느냐'의 응답은 다르다. 전자가 버텨 주면 후자가 떨어져도 이탈은 덜하다. 그러나 부동산 따로, 교육 따로, 노동 따로 접근하니 어느 하나도 풀리지 않았다.

2021년 4·7 보궐선거에서, 국정수행지지도만 보던 사람들은 참패를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격차에 대한 불만에서 시작되어 조국 사태로 표면화된 세부지표는, 이미 악화되고 있었다. 부동산은 모든 균열이 하나의 숫자로 집계된 청구서였을 뿐이다.

유난히 여론 동향에 신경을 썼던 당시의 청와대는 자체 조사를 돌리고 있었고, 분석을 업으로 삼던 이들이 무당층과 중도층의 이탈 폭이 지지층보다 훨씬 크다는 데이터를 놓쳤을 리 없다. 그러나 그들이 판세를 읽는 기준은, 매주 갤럽과 리얼미터 조사의 오차범위 안 1~2%p 등락에도 의미를 붙이는, 언론의 지지율 보도였다. 40%대 국정지지율이 유지된다는 착시 탓에, 물밑에서 진행되던 근본적 민심이반을 놓친 것이다.

지지층 역시 마찬가지였다.

방치된 불평등, 의사 집단의 동질화

2020년과 2024년, 두 차례의 의사 진료거부가 있었다. 2020년에는 정부가 10년간 4천 명 증원과 공공의대 설립을 발표하자 전공의 대다수가 진료거부에 들어갔고, 의대생들은 국가고시 응시를 거부했다. 2024년에는 정부가 연간 2천 명 증원을 발표하자 전공의 대다수가 수련병원을 이탈했다.

2020년 의협 의료정책연구소의 '전교 1등 의사' 홍보물에 드러난 노골적 선민의식은 전국민의 비웃음을 샀다. 의대생·의사 커뮤니티에서는 '국평오'(국민 평균은 수능 5등급)라는 표현이 일상적으로 통용된다. 수능 등급으로 사람을 줄세우고, 그 서열이 직업적 권위와 보상의 근거가 된다는 생각이다. 이런 담론은 갑자기 튀어나오지 않는다. 동질화된 집단 안에서 오래 쌓여야 한다.

필자는 2020년과 2024년 모두 '다른 생각을 가진 의대생들(다생의)'을 조직해 주류 의사 집단을 비판하는 쪽에 섰다. 2020년 처음 활동할 때는 내부의 억압이나 고충을 알리려 김어준의 뉴스공장에도 출연했지만, 진행자는 여러 증언 가운데서도 의사들의 극우화나 일베 문화 같은 말초적인 부분에만 주목했다.

비판은 필요했지만, 거기서 멈추면 하지 않느니만 못했다. 우리는 의사 사회의 비민주적 문화가 어디서 비롯됐는지, 특권적 전문직의 집단행동이 의료라는 필수적 사회안전망을 어떻게 위협하는지를 물어야 했다. 극우화라는 진영논리에만 담론이 쏠리면 내부에서도 반박 논리가 생기고, 용기 내 비판에 나선 사람만 소모되며 실질적 해법은 멀어진다. 클릭 수만 나올 뿐 문제는 풀리지 않는다.

2020년의 합의와 2024년의 진료거부, 두 차례의 후퇴로 의사 양성 정책은 표류 중이다. 의대 증원이든 공공의료 확충이든 지역의사제든, 정책의 도입은 최소한 10년은 늦어졌다. 의대생 구성이 조금이라도 다양해지기를, 공공의식 있는 동료가 더 들어오기를 바라 온 입장에서 말하면, 2025년 지금의 상황은 2020년보다 나빠졌으면 나빠졌지 좋아지지는 않았다.

진영의 선부터 긋는 담론이 퍼질수록 주류와 다른 견해를 갖는 사람은 직업적·사회적 제재를 받으며 고립되고, 진보적 의제를 위해 함께 일할 사람은커녕 무언가를 논의할 상대조차 사라진다. 김어준 등의 진영논리가 이 악순환을 키운 것이다.

2020년 의사 집단을 비판했던 분들에게 묻고 싶다. 우리가 과연 동지가 맞나. 이후 재생산 구조나 전문직 사회 내부의 동질성과 선민의식 문제에 얼마나 관심을 가졌나. 학부모로서, 돈 쓴 만큼 대입에서 성과가 나오는 지금의 제도를 건드리기를 주저하지 않았나. 그리고 2024년, 의사들이 상대하는 진영이 바뀌었을 때 그들 편을 들고 싶은 유혹을 얼마나 참았나.

필자는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측의 영입 제안을 받았다. 이후 어느 공공기관의 수장으로 임명된 인사를 통한 접촉이었다. 그는 거듭된 정정에도 불구하고 사직 전공의인지를 거듭 물었는데, 진정성보다 지금 국면에서의 쓰임새부터 살피는 모습이 먼저 보였다.

모두 의사 집단의 이기주의를 거듭 고발했던 입장에서, 이런 접근을 본 뒤 그들의 의지와 진정성을, 나아가 개혁의 청사진이 실제로 존재하기는 하는지까지 의심하게 되었다. 이 구조를 해체하는 일에 그런 셈법이 들어설 수는 없다. 변화에 따르는 현실의 지난한 노력을, 얄팍한 '극우 청년 비판' 담론으로 대신할 수도 없다. 대입의 성과가 대치동 등의 몇몇 지역으로 쏠리는 한, 의사들의 집단이기주의를 견제한다는 말은 애초에 성립할 수가 없다.

서울 강남권·고소득 가구 출신 비율이 높아질수록, 동질화된 집단 내부의 세계관도 수렴한다. 앞서 본 의사들의 선민의식, 공공의료 확대를 기득권 침해로 보는 프레이밍, 지역 필수의료 붕괴에 대한 무관심은, 같은 학원에서 같은 입시 전략으로 같은 계층끼리 경쟁하며 올라온 집단이 공유하는 세계관일 뿐이다.

스누라이프, 에브리타임 같은 대학 커뮤니티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진다. 특정 의제에 대한 쏠림과 이견을 배척하는 태도가 일상이 된 것이다. 다양한 계층과 지역의 입장이 섞여 있던 의견의 폭 역시, 입학생 구성의 동질화와 함께 좁아졌다. 이 커뮤니티들이 20·30대 여론을 이끌면서, 동질화된 엘리트 집단의 세계관이 세대 전체의 목소리인 양 증폭된다. 청년층의 정치적 태도 변화를 '우경화'로만 읽으면 이 구조를 놓친다.

한국 사회에서 계층을 나누는 것은 결국 부동산, 즉 거주지역과 학군이다. 강남권 집값을 끌어올리는 것이 대입 실적이고, 28번의 대책을 내면서도 정작 그 원인은 건드리지 않는 사이 비용을 부담할 수 있는 계층은 더 좁아진다. 그렇게 비슷한 출신의, 유사한 경험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특정 유명 고교와 대학, 의대와 로스쿨을 채우고, 교육과 부동산과 여론 주도층이 각자가 키운 격차를 다시 강화한다.

라볼피아나가 그러했듯, 리버럴이 강조하는 절대평가나 논서술형, 창의체험활동 역시 설계와 검증 없이는 부담은 어딘가로 옮겨갈 뿐, 당사자들은 변화를 변화로 체감하지 못한다. 결국 어떤 대안이 됐든, 창의성과 사고력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또 다른 암기식 교육이 될 뿐이다. 리버럴 기성세대가 교육 의제를 방치한 자리를, 사교육 업체와 '공정'을 자기 식으로 정의하는 보수 담론이 채운다.

그래서 조국 사태로부터 시작된 일련의 정국에서 리버럴은 프레임 싸움에서 밀린 것이 아니다. 애초에 밀릴 프레임 자체가 없었다. 진료거부 국면에서 의사들의 계급적 동질성이 어떻게 형성됐는지 설명할 프레임이 없으니, 정국 내내 지속된 여론의 압도적 우위도 증원 같은 정책에서의 실질적 성과로 이어지지 못했다.

아니, 프레임의 유무를 따지기 전에 프레임을 세울 토대부터 없었다. 그렇기에 윤석열이 주도한 '킬러 문항 정국' 때 정권의 섣부른 조치를 비판한 대치동 일타강사를 민주당 지지층이 속시원하다며 응원하고, 그게 왜 문제인지조차 모르는 촌극까지 벌어진 것이다.

현실을 성실하게 이해해야 하는 자신들의 의무를 원론의 무성의한 반복으로 대체하고, 당사자 앞에서는 절대 물리지 않는 당위도 사실 정파적 당리당략 앞에 손바닥 뒤집듯 흔들리는 것을 모두가 안다. 여기까지 오면 불신은 개별 정책에 머무르지 않는다. 납득되지 않는 결정의 이유를 해명하라는 처음의 요구는, 애초에 당신들에게 문제를 다룰 자격이 있었냐는 불신임으로 넘어간다.

정치 현안만 좇으며 반사적 대응에만 급급한 세력은 매번 살만 얻고 뼈는 내준다. 경기 내내 볼 점유율이 높아도 유난히 날카로운 상대의 역습 한 번에 어느새 경기가 넘어가 있다. 그런 일이 되풀이된다면, 과연 운이 나쁘기만 한 걸까? 실제 정치의 성패는 지지율과 의석수만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조국 사태는 끝난 적이 없다. 불편했어야 했고, 지금도 불편해야 한다. 조국 개인에 대한 사법적·정치적 정산은 어느 정도 마무리됐다. 그러나 그 사건이 우리 사회에 던진 질문은 종결은커녕, 무엇이었는지 해독조차 되지 못한 채, 아니, 어쩌면 들렸음에도 듣지 않기로 한 채 남아 있다.

현상의 이면을 봐야 한다

오늘 여의도의 누가 어떤 말을 했고, 검찰이 무엇을 했는지 같은 뉴스마다 하나하나 댓글을 달면, 정치에 참여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렇게 5년을 보냈는데 0.73%p 차이로 졌다. 왜 졌는지 제대로 복기했는가.

김어준이 방송에서 무엇을 잘못 말했고, 조선일보가 정권의 여러 정책을 어떻게 악의적으로 프레이밍했고, 선관위가 무엇을 하지 않았는지를 따지는 글은 넘쳤다. 그러나 교육과 부동산에서 벌어진 격차가 어떻게 공정성 담론으로 이어지며 표심이 떠났는지를 깊이있게 짚는 분석은 부족했다.

'박탈감닷컴', '조은산의 시무 7조' 같은, 언론이 인위적으로 만든 프레임은 분명 있었고, 실제로 어느 정도 문재인 정권에 불리하게 작동한 것도 부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모든 것이 프레임 때문이라는 식으로 전부를 설명할 수는 없다. 시민은 일부 세력의 프레임이 잘 만들어졌다는 이유만으로 속아 넘어갈 만큼 단순하거나 수동적이지 않다. 프레임이 먹힌 것은 그 프레임이 파고들 현실의 균열이 이미 있었기 때문이다.

구조를 보지 않으면, 균열도 인식할 수 없게 된다. 킬러문항만을 탓하거나 로드리 한 명을 막는 대신 시스템 전체를 봐야 한다는 데까지는 많은 이들이 수긍한다. 그럼에도 그 중 대부분은 어려움을 이유로, 불평등 확대로 인한 지방 학생들의 피해 대신 조국 일가의 억울함 같은 당장의 현안에만 주목한다. 그러면 '공정'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커지기만 하고, 가는 길은 달라도 결국 표층에서 허우적거리는 같은 결말에 이른다.

다시 축구 이야기로 돌아오자. 앞서 현안의 복합성을 말하며 예시로 든 맨체스터 시티의 수비형 미드필더 로드리는, 2024년 그해 축구계에서 최고의 활약을 한 선수에게 주는, 발롱도르를 수상했다. 공격수가 아니기에 원래는 이 상의 후보군에 들기조차 어려웠던 그의 수상은, 개인의 역량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같은 자리에서 뛴 그의 대표팀 선배, 세르히오 부스케츠가 로드리보다 경기에 현저하게 덜 기여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런데도 그는 매 해의 베스트 11 명단에도 좀처럼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사람들이 경기를 그렇게 읽지 않았기에 그렇게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축구를 읽는 방식이 바뀌자, 로드리 같은 선수가 다시 평가받는 것을 넘어, 담론의 질 자체가 달라졌다. 예전에는 트로피 개수와 하이라이트로 팀과 코칭스태프, 선수를 평가하던 팬들이, 이제 경기력을 좌우하는 모든 요소에 눈을 돌렸다. 그들은 결과 못지않게, 승리를 만들어낸 과정, 그리고 그 과정을 어떻게 반복해 성공을 이어갈 수 있는지를 묻는다. 패배한 경기라도 값진 패배였다면 과정은 결과와 따로 평가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잉글랜드의 브라이튼 같은 중소 구단도 선수 육성과 전술 철학에서 성과를 내고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면, 우승컵이 없어도 과정만으로 높은 평가를 받는다. 축구의 일이라고는 해도, 사람들이 세상을 읽고 행동하는 방식이 조금이나마 나아진 사례다.

이런 근본적인 시선의 전환은 정치인이나 전문가, 저명한 인사가 시민을 대신해 해줄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어떤 개인이 선구적 시각을 가져도, 그 시각을 공적 결정에 반영하려면 자신의 판단을 대중에게 설명해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그 개인의 노력은 '한 사람의 임의적 결정'이라는 이유로 어떻게든 꺾이고 만다.

평범한 시민들이 언제나 옳다는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이 자신의 삶에서 보다 많은 것을 보고, 어떤 이상이 현실에 구현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할지를 더 많이 고민한다는 점만큼은 부정할 수 없다.

사회를 달리 보려는 시도는 결국 우리 스스로의 몫이다. 복합적 시선으로 세상을 읽는 연습이 쉽지는 않다. 그래도 그 일은 때로 즐겁고, 드물게 보람 있다. 축구에서 가능했던 일이 정치에서 불가능할 이유는 없다.

이 글을 읽는 이들이 교육 문제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저마다 다를 것이다. 자녀 대입에 도움이 될까 해서일 수도, 시민으로서 의무감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런데 지금의 시민들은 취지와 방향만을 보지 않는다. 앞서의 자사고 전환을 두고 그러했듯, 실행과 그 비용, 그리고 어긋났을 때의 책임까지 묻는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당장의 선거 같은 현안 대신, 보다 깊은 층위에서 작동하는 사회현상의 기전을 다루려 했다.

교육은 미래와 연결되기에, 그 흐름을 만드는 조건 중에서도 가장 근본적이고 복합적이다. 시민들의 질문에 응답하지 않는 권력은 설득력을 잃는 것을 넘어, 끝내 문제를 다룰 자격 자체를 의심받는다. 당위는 이미 충분히 많은 사람이 말하고 있기에, 누군가는 그 구호 이면의 대차대조표를 살펴야 한다.

검증할 수 없는 선의는, 결과를 바꾸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치며

지금까지는 작년 말 시점의 이야기였다. 이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을 짚어 본다.

2024년 9월 팔레스타인과의 경기가 열린 상암동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전광판에 정몽규 대한축구협회 회장, 홍명보 대표팀 감독이 잡힐 때마다 팬들은 "정몽규 나가", "홍명보 나가"를 외쳤다. 큰 대회를 치르기 전이었지만, 팬들은 이미 선임 과정을 보고 구호를 외친 것이다. 그들의 생각이 모두 같았을 리는 없다. 정말로 사퇴를 요구하는 이들부터, 정신을 차리기를 바라고 함께 외친 이들, 그저 재미있어서 따라한 이들까지 있었을 것이다. 다만 응원과 비판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대표팀을 포기한 팬이라면, 굳이 상암까지 와서 누군가의 사퇴를 요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나가"까지 나왔다면, 이를 단순한 불만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 감독만이 문제였다면 협회장의 사퇴까지 외칠 이유는 없다. 협회가 형식상이라도 설명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라볼피아나도 말했다. 프로그레션과 뒷공간 침투도 말했다. 그러나 팬들은 홍명보의 전술이 궁금했던 것도, 더 잘하라고 "홍명보 나가"를 외친 것도 아니다. 왜 스스로도 선임 과정을 설명하기 어려운 감독을 뽑았는지, 그런 결정을 한 사람들이 왜 여전히 자리를 지키는지를 따져묻고 있을 뿐이다.

당연히 사퇴는 해야 한다. 그러나 이제는 감독 한 명의 책임으로 끝낼 수는 없다. 홍명보 감독의 사퇴 기자회견에서, 박항서 대표팀지원단장은 고개를 숙이며 "축구협회는 뼈를 깎는 반성과 성찰로 다시 미래를 준비해 나갈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팬들은 이제 성찰을 바라는 대신, 미래를 말할 자격 자체를 묻는다.

축구에서 그랬듯, 정치에서도 마찬가지다. 흔히 청년 세대의 극우화로만 불리는, 리버럴 기성세대에 대한 반감 역시 한 덩어리가 아니다. 그 안에는 당장의 용퇴와 심판만을 바라는 사람도, 책임자 몇을 바꾸면 수긍할 수 있다 보는 사람도, 기대를 거두지 않았지만 지금은 강도 높은 비판이 필요하다 여긴 사람도, 분노와 재미를 느끼며 분위기에 올라탄 사람도 있을 것이다.

상암에서 응원과 비판이 모순되지 않았듯, 정치도 다르지 않다. 그러나 경기장에서 팬들이 외친 구호와 달리, 표에는 이유가 적혀 있지 않다. 그 정서를 읽는 것은 정치인과 지지자들의 몫이어야 했다.

누군가는 더 듣겠다, 성찰하겠다, 다음에는 더 잘하겠다고 읍소한다. 다른 누군가는 청년 세대가 통째로 극우화됐다고 외친다. 반응은 달랐지만, 읽는 대신 저마다의 해석을 덧붙였다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다. 청년 세대는 앞의 반응을 "답은 정해져 있고, 너는 대답만 하면 된다"는 뜻으로 이해한다. 그들은 그 성찰이 책임지는 외양의 연출일 뿐, 사람도, 정책의 기조도 그대로라는 점을 안다. 뒤의 반응을 본 청년들은, 권력을 쥔 이들이 책임을 자신들에게 뒤집어씌우기까지 한다고 냉소할 뿐이다.

리버럴 기성세대에게 당장 그만두라는 말까지 하지는 않겠다. 중이 제 머리를 못 깎는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불만과 구호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도 없다. 그렇지만 청년 세대의 "나가라"는 구호의 이면을 살피는 대신, 편할 대로 "소통하라", "더 잘하라"는 식으로 받아들이고는 청구서를 해결했다 착각해서도 안 된다. 청구서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저 연체료와 함께 돌아갈 날을 기다린다.

표는 보통 말없이 빠진다. 더 이상 분노가 들리지 않는 어느 날, 기대도, 항의도, 설득당할 마음도 남지 않은 채 조용히 빠져나가는 그 날을 가장 무서워해야 한다. 불만의 외침을 천재지변이나 음모의 결과로 여기고, 그 함성이 사라진 뒤의 침묵을 안정으로 착각하는 한, 다음 청구서에는 더 큰 숫자가 찍힐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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