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다녀온 국회토론회의 제목은 '돌봄경제와 산업발전 방안'이었다. 돌봄을 복지나 비용으로만 생각하던 종래의 관점을 넘어 경제와 산업 발전의 주요 축으로 생각해보자는 제안이었다. 발표자 류재린(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사회계정행렬을 이용한 돌봄경제의 투자효과 분석' 에 따르면 2022년 기준 정부와 민간의 돌봄 부문 총지출 44.7조 원의 결과, 생산활동 부문에 약 205.5 조원의 소득효과가 생겼다. 투자 대비 4.6배라는 상당한 생산성이 정부의 통계자료를 분석한 수치로 선명하게 보여진 것은 처음이다. 익히 알려져 있는 돌봄의 고용효과(22년 기준 91.3만 명)를 더해 생각해보면 돌봄은 단순한 비용 지출이 아닌 경제적 선순환을 가져오는 주요 산업의 하나임이 분명하다. 토론회에서는 앞으로 돌봄을 노동집약적 산업만이 아닌 AI와 결합한 스마트 돌봄, 디지털 케어, 혁신 기술과 기기가 현장에 빠르게 접목되는 기술융합산업으로서 인식하고 적극적으로 지원하라는 제언이 이어졌다.
돌봄을 사회 전체에 부담만 주는 비용으로 보는 시각을 벗어나 돌봄의 경제적 효과를 가시화하고, 돌봄 받는 사람과 돌보는 사람을 적절히 지원해주는 기술의 혁신과 도입은 꼭 필요하다. 돌봄 산업의 발달과 함께 서비스가 세분화되고 그간 비어 있던 필요가 일정 부분 채워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동시에 서비스는 존재하지만 누구나 접근할 수는 없는 현실도 자명하다. 지불할 수 없어서, 수도권에 살지 않아서, 와상 환자나 중증 장애인은 받아주지 않아서, 디지털 기술에 익숙치 않아서, 돌볼 사람이 나 한 명 뿐이어서. 경제적 이익이 없기에 좀처럼 개발되지 않는 분야도 있다. 돌봄산업 발전만으론 우리가 바라는 '돌봄이 풍요롭고 정의로운 사회'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렇기에 평범한 주민들이 자기가 살고 있는 동네에서 만들어가는 의료, 돌봄, 주민참여 사업과 활동 역시 중요한 돌봄의 혁신으로 읽어내어, 지속가능한 돌봄을 위한 사회적 체계의 한 축으로서 인정하고 지원할 것을 제안하는 바이다.
몸담고 있는 살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이하 살림)에서 조합원들과 함께 정의한 좋은 돌봄은 '자기돌봄'과 '서로돌봄', '함께돌봄'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돌봄이다.
끝까지 나답게, 자기돌봄
아플 때든 아프지 않을 때는 내 건강의 주체가 전문가인 의료진이 아닌 나 자신인 것처럼, 돌봄이 필요할 때도 언제까지나 내가 내 돌봄의 주체가 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 '자기돌봄'의 의미다. 나의 잔존 기능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기회, 주어진 대로 받는 것이 아닌 취향과 나다움이 반영될 수 있는 선택지, 돌봄을 받기만 하지 않고 내가 나를 돌보는 힘을 믿고, 나도 도울 수 있는 것이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다. 이런 관점에서 돌봄을 제공하려는 노동자, 자원활동가, 이웃과 조직이 있을 때, 돌봄 정책과 제도도 같은 방향을 지지할 때 가능한 일이다.
서로돌봄, 서로가 있기에 나다울 수 있다는 연결에 대한 감각
아는 사람들, 알아주려는 사람들이 곁에 있기에 나다움을 지키는 돌봄도 가능하다. 살림은 사려 깊은 의료기관(의원, 치과, 한의원, 재택의료센터), 돌봄기관(데이케어, 방문요양, 노인일자리, 장애인활동지원 등)만 조합원의 힘으로 운영하는 것이 아니다.
수많은 조합원과 주민들이 모여 50여 개의 취미, 학습, 운동, 지역 기반 모임이 연 1000회 이상 열린다. 모여서 대단히 특별한 것을 하는 것은 아니다. 같이 산에 가고, 달리고, 반찬을 만들어 나눠 갖고, 풋살을 하고, 외국어를 공부하고, 여성주의 책을 읽는다. 지역모임의 이점을 살려 걸어올 수 있는 거리에 사는 사람들이 동네 공터에 모여 배드민턴을 치고 근처 맛집에서 시원한 맥주를 한 잔 하기도 한다.
각자도생으로 경쟁 속에서 살아가다가 어려움이 생기면 본인책임이니 알아서 해결할 것을 요구하는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자신과 혈연가족을 넘어 다른 사람에게 도움과 돌봄을 요청하고, 또 응답하는 것은 자연스럽게 벌어질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아프거나 돌봄이 필요하기 전부터 맺어왔던 즐겁고 오래된 관계가 필요할 땐 강력한 돌봄의 다층 서클로 작동한다. 아픈 사람이 생기면 살림의 의료인뿐 아니라 조합원들도 바빠진다. 직접적인 간병에서부터 결정이 필요할 때 대화 상대 되주기, 병원 동행, 행정 지원, 일상생활 돕기, 취미생활 같이 하기, 작은 모금과 그냥 곁에 있어주기까지. 아픈 것을 말하는 것은 남에게 폐를 끼칠까 숨겨야 하는 일이 아닌, 관심과 손길이 원래 있던 관계망을 따라 흐르며 더 튼튼해지는 소중한 기회가 된다.
그러기 위해선 나와 가장 가까운 한 두 사람에게 모든 돌봄을 기대기보다는 각기 다른 종류, 밀도의 돌봄을 주고 받을 수 있는 다양한 돌봄 관계망이 필수다. 아직까지 독박돌봄이 만연한 한국사회에서 누군가의 노고가 너무 커져서 돌봄의 기쁨과 보람을 넘어서지 않도록 가족, 지인, 친구, 전문가가 같이 돌봄을 나눠 맡고 함께 조정하는 체계와 경험이야말로, 우리가 의미를 부여하고 확산해야 할 돌봄의 혁신이다.
함께돌봄, 지속가능한 돌봄생태계를 운영하는 주민의 힘
서로돌봄의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사는 동네는 돌봄이 풍요로운 커뮤니티가 된다. 길에서 인지저하증(치매) 주민을 만났을 때 어떻게 다가가서 말을 걸고, 어디로 안내하면 되는지 아는 사람이 많은 동네, 누군가 도움이 필요할 때 금방 다가가는 사람이 있고, 그런 사람이 한 둘이 아닌 동네. 그런 동네가 되기 위해서는 느슨하고 안전한 관계에서 시작해 건강과 돌봄에 대한 공동의 관심사와 경험을 꾸준히 가꿔갈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살림은 올 하반기, 조합원 서로돌봄 시범사업을 통해 도움과 돌봄이 필요한 사람들이 기꺼이 돌봐주겠다는 사람과 얼마나 매칭될 수 있는 지 실험해보려고 한다. 작년 조합원 5000명의 50% 이상이 참여한 총조사 결과 약 500여 명의 조합원이 적극적으로 서로돌봄 사업에 참여하겠다고 응답했다. 전국 곳곳에는 시장과 제도의 사각지대, 시장과 제도가 미처 상상하지 못하는 영역까지, 내가 나이들고 싶은 마을을 지금 여기에서부터 만들어가겠다는 의지를 가진 주민들과 조직이 있다. 돌봄의 소비자나 수혜자를 넘어 운영자와 생산자가 되겠다는 복합 정체성을 구현하는 시민들의 탄생이야말로 지금의 한국 사회가 지향할 돌봄의 혁신이 아닐까.
마음이 있는 누구라도, 돌봄매트릭스
지역 돌봄의 혁신이 꾸준히 이어지기 위해서는 아직 동네에 아는 사람이 많지 않거나 돌봄 경험이 별로 없는 사람도 누구나 원한다면 돌봄 네트워크에 진입할 수 있도록 문이 상시 활짝 열려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지역의 조직적 역량과 경험이 뒷받침 될 때 가능한 환대다. 그러기 위해서는 각자가 가능한 만큼의 마음을 냈을 때 해볼만한 돌봄 사업과 활동을 촘촘하게 구상하고 있어야한다. 살림에서는 이를 '돌봄매트릭스'라고 부른다. 매주 한 번씩 시간을 내는 사람부터 한 달에 한 번 정도 돌봄자원활동을 할 수 있는 사람, 비정기적으로 특정 돌봄 활동이 하고 싶은 사람까지. 누구든 시간과 마음을 낸 만큼 좋은 경험과 보람, 배움이 있다면 돌봄은 점점 더 해보고 싶고 권하고 싶은 일이 되어간다. 어쩌면 사람들에게 남을 돌보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 상황과 욕구에 딱 맞는 돌봄활동이 충분치 않은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해나갈 일은 더 재미있고 매력적인 돌봄 활동을 계속 개발하며 우리 동네에 최적화된 돌봄매트릭스를 만들어 가는 일이 되겠다.
주민조직의 돌봄혁신을 위해
물론 절박한 필요가 있을 때 바로 대응이 가능하도록 전문성과 지속가능성을 가지고 운영되는 의료기관, 돌봄기관도 필요하다. 이 역시 협동조합이라는 틀거리와 주민의 참여가 있기에 가능했다. 몇 사람만의 뜻과 의지로는 지속하기 어려운 조직 운영과 정말 다양한 필요와 욕구를 가진 주민 전반에게 너르게 열려있는 지역돌봄생태계의 혁신을 촉진하고 지원하기 위해서는 주민 주도 조직의 도전과 사업에도 돌봄 산업만큼 제도와 정책의 관심과 지원이 주어질 필요가 있다. 한 번이라도 만들어졌던 모임과 활동은 지역의 사회적 자본으로 남는다. 사업적으로는 돈을 벌기 어려웠던 아이템이 노인일자리나 주민참여예산 같은 다른 트랙을 통해 부활하여 큰 사회적 임팩트를 만들어내는 경우도 많다. 대규모 돌봄 사업이나 AI 돌봄 기술벤처 뿐 아니라 지역주민들의 돌봄생태계활동에도 실패해도 되는 자유를 바탕으로 용감한 도전과 시도가 수도 없이 일어날 수 있기를, 그래서 그 결과가 특정 투자자나 창업자가 아닌 지역 전체에게 돌아가는 모델이 훨씬 더 많아지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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