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2월, 크림반도의 작은 휴양지 얄타(Yalta)에 모인 루스벨트, 처칠, 스탈린은 세계지도를 펼쳐놓고 전후 질서를 양분했다. 그날의 협상은 단순한 외교적 이벤트가 아니었다. 인류는 이후 반세기 동안 미국과 소련이라는 두 초강대국이 그은 보이지 않는 선(線) 안에서 움직여야 했다.
그로부터 80여 년이 흐른 2026년 현재, 우리는 또 하나의 ‘얄타체제’를 맞이하고 있다. 다만 이번에는 강대국의 정상들이 회담장에 앉아 있지 않다. 실리콘밸리와 베이징의 첨단 연구소에서 수천억 개의 파라미터를 학습시키는 엔지니어들과 거대 테크 기업들이 새로운 국제질서의 연출가로 대두하고 있다.
분명히 해야 할 점이 있다. 인공지능(AI), 그리고 인간의 지성을 초월하는 초지능(ASI)의 등장은 단순한 ‘제5차 산업혁명’이 아니다. 그것은 국제정치의 문법과 패권의 본질을 통째로 뒤흔드는 ‘국제질서의 혁명’이다.
역사적으로 패권국은 언제나 시대의 핵심 기술을 독점하고, 이를 투사해 자신들에게 유리한 국제체제를 설계해 왔다. 19세기 영국은 증기기관과 해군력으로 ‘팍스 브리태니카’를 열었고, 20세기 미국은 달러화와 인터넷이라는 표준을 쥐고 ‘팍스 아메리카나’를 구축했다. 그렇다면 21세기 미·중 패권 경쟁의 종착지는 어디인가. 바로 초지능을 통한 새로운 지구적 지배 질서의 확립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국제정치학적 대전환은 미·중이 경쟁하는 대상이 단순한 연산력이나 반도체 같은 ‘물리적 기술’에 그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미래 인류의 판단 기준과 가치 체계’를 선점하려 한다.
최근 중국 AI 모델의 대표 주자인 즈푸(Zhipu) AI의 탕제 CEO가 발표한 내부 서한은 이 냉혹한 현실을 날것 그대로 보여준다. 그는 범용인공지능(AGI)으로 가는 미래 전략을 발표하며, 인류의 윤리와 사회규범은 물론 ‘국가의 법규’를 AI 모델의 심층부인 가치 함수(Value Function)에 기저 공리로 내재화하겠다고 선언했다. AI가 단순히 중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수준을 넘어, 중국의 국가질서와 통치 철학대로 사고하도록 뇌세포 자체를 설계하겠다는 뜻이다.
미국 역시 거칠게 정면충돌하면서도 본질은 같은 궤도를 달리고 있다. 워싱턴은 연방정부의 막강한 조달 구매력과 국방부 기밀망 계약, 그리고 강력한 수출통제를 통해 프론티어 AI 기업들을 국가 안보 전략 체계 안으로 빠르게 편입시키는 중이다. 올해 초 미 국방부가 자국 윤리 기준을 고집하려던 앤트로픽을 사상 처음으로 ‘공급망 리스크 기업’으로 지정하며 거세게 압박한 사건이 이를 방증한다.
중국은 국가가 기업을 직접 통제하고, 미국은 시장 메커니즘을 통해 우회할 뿐, 초지능을 자국 안보전략의 핵심 도구로 삼으려는 목적은 완벽히 동일하다. 과거의 냉전이 이념(Ideology) 경쟁이었고, 탈냉전기가 시장(Market) 경쟁이었다면, AI 시대의 본질은 ‘가치 함수(Value Function)의 경쟁’이다. 조만간 AI는 정보 검색을 넘어 인간의 중대한 의사결정을 대행하게 된다. 어떤 판례를 우선 적용할 것인가, 안보 위기 시 어떤 무기 체계를 가동할 것인가, 재난 상황에서 어떤 생명을 먼저 구할 것인가와 같은 국가적·윤리적 결정이 AI 내부의 가치 함수에 의해 좌우된다. 결국 미래의 패권은 영토나 군사기지가 아니라, 알고리즘 속 가치 체계를 쥐고 있는 자에게 돌아간다.
21세기의 강대국은 더 이상 영토를 넓히기 위해 피를 흘리지 않는다. 대신 자국의 가치 함수가 이식된 AI 모델을 배포한다. 군대를 주둔시키는 대신 운영체제(LLM OS)를 보급하고, 물리적 식민지를 만드는 대신 ‘알고리즘 식민지’를 확산시킨다. 이것이 바로 필자가 경고하고자 하는 ‘AI 얄타체제’의 본질이다.
이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서 대한민국은 번지수를 제대로 찾고 있는가. 우리는 그동안 ‘소버린 AI(자주적 AI)’를 한국어를 잘하고 우리 문화에 친숙한 독자 모델을 보유하는 기술적·산업적 차원으로만 이해해 왔다. 그러나 진정한 소버린 AI의 핵심은 언어나 데이터센터의 숫자가 아니라 ‘판단과 가치의 주권’에 있다.
우리 헌법적 가치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한반도의 복합 위기 속에서 국가안보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의 문제를 외산 AI 모델에 의존하는 순간, 우리는 기술을 수입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최고 의사결정 능력 자체를 타국에 외주화하는 셈이 된다. 국제정치에서 이보다 무력하고 위험한 종속은 없다. 더구나 현재 국경을 넘어 무료로 소리 없이 깔리고 있는 오픈소스 AI 모델들의 달콤함 뒤에는 타국의 공리와 이념이 DNA 수준에서 침투하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과거 산업혁명은 생산방식을 바꿨고, 인터넷은 정보의 흐름을 바꿨지만, 초지능은 국가의 사유방식과 의사결정 메커니즘 자체를 지배한다. 대한민국의 시급한 과제는 미·중이 분점하는 AI 얄타체제의 하위 파트너나 알고리즘 식민지로 전락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의 민주주의, 법치주의, 그리고 시민의 기본권이라는 대한민국 헌법의 핵심 가치가 스스로 사고하고 판단할 수 있는 ‘주체적 초지능’을 구현해야 한다. AI 시대의 진정한 국방과 안보는 바로 여기서 시작된다.
구글에서 프레시안을 더 자주 만나기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