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격(國格)은 선언으로 완성되지 않으며, 외교의 실용은 오직 당당한 주권의 토대 위에서만 꽃을 피운다. 이재명 대통령이 천명한 '실용적 주권외교'의 본질은 명료하다. 철저히 국익과 국민을 중심에 두고, 강대국의 맹목적 추종에서 벗어나 평화중견국으로서 대한민국의 목소리를 당당하게 내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국가 안보의 사령탑을 맡고 있는 관료들의 행태는 대통령의 통치 철학과 궤를 완전히 달리하는 것을 넘어, 국가 존재의 이유를 뿌리째 흔들고 있다. 최근 공해상에서 발생한 대한민국 국민 강제 구금 사태를 대하는 국가안보실과 외교부 관료들의 태도는 그 서글픈 단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초법적 폭거 앞의 침묵, 그들은 누구의 대변인인가?
가자지구로 향하던 민간 구호선단이 공해상에서 이스라엘군에 의해 나포되고 우리 국민을 포함한 활동가들이 억류된 사건은 명백한 국제법 위반이자 초법적 폭거다. 심지어 이스라엘 극우 장관이 손목이 묶인 민간인들을 무릎 꿇려놓고 조롱하는 영상을 공개했을 때, 국제사회마저 자성의 목소리를 냈다.
그러나 대한민국 외교 당국의 첫 일성은 충격적이었다. 위성락 국가안보실장을 비롯한 관료들은 국무회의 등 공식 석상에서 "이스라엘이 관할권을 주장한다", "해상 봉쇄는 합법적이라는 반박이 있다"라며 침략국의 해명을 그대로 읊조렸다. 주권 국가의 안보수장이 자국민의 안위보다 이스라엘 정부의 변명을 먼저 대변하고 나선 것이다.
국제형사재판소(ICC)가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에 대해 전쟁범죄 혐의로 체포영장을 발부한 상황에서도, 이들은 미국과 동맹국의 눈치 보기에 급급해 "검토하겠다", "복잡하다"라는 맹탕의 답변으로 일관했다. 논란이 거셀수록 당당한 국가적 입장을 세우는 것이 안보실의 임무이거늘, 이들은 중립이라는 미명 하에 무책임한 '방치'를 택했다.
역사의 거울 : 곽개(郭開)의 사익과 기철(奇轍)의 사대
강대국의 위세에 기생해 주체적 판단을 미루고 국가의 자존을 무너뜨리는 굴종 외교는 동서고금의 역사 속에서 나라를 위기로 몰아넣었던 망국의 전조(前兆)와 소름끼치도록 닮아 있다.
중국 전국시대, 진(秦)나라의 침략에 직면했던 조(趙)나라의 관료 곽개(郭開)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사리사욕과 권력 유지에 눈이 멀어 강대국인 진나라의 위세에 편승했다. 조나라를 지키던 유일한 희망인 명장 이목(李牧)을 모함해 죽임으로써 국가 안보의 핵심 보루를 스스로 허물었다. 침략국의 요구에 유약하게 굴복하며 자신들의 안위만을 보전하려 했던 결과는 조나라의 비참한 멸망이었다.
우리 역사 속 고려 말의 기철(奇轍) 일족 역시 마찬가지다. 원나라 황실의 권위에 빌붙어 권세를 부렸던 이들 친원파 가문에게 국익과 백성의 안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오직 상국(上國)의 눈치만 보며 고려의 자주 군사권과 주권을 저당 잡았던 그들의 사대주의는 국가의 기능을 완전히 마비시켰다. 만약 공민왕의 과감한 결단과 대대적인 인적 숙청이 없었다면, 고려의 국체는 역사 속에서 영원히 지워졌을지도 모른다.
과거 나라를 위태롭게 했던 사대주의자들이 보인 '기준 없음'과 지금 위성락 실장이 보여주는 '책임 회피'는 본질적으로 같은 궤를 그리며 대한민국을 외교적 미아로 만들고 있다.
"가지 말라는데 왜 갔나"라는 망언, 국가의 존재 이유를 부정하다
더욱 심각한 것은 자국민을 대하는 안보실의 얄팍한 인식이다. 일각에서 흘러나오는 "정부가 가지 말라고 한 위험 지역에 갔으니 어쩔 수 없다"는 식의 논리는 국가가 스스로 보호 의무를 포기하겠다는 선언과 다름없다.
국가의 국민 보호 의무는 '조건부 계약'이 아니다. 국민이 어떤 선택을 했든, 타국에 의해 부당하게 자유를 유린당했다면 조건 없이 항의하고 구출에 나서는 것이 주권 국가의 헌법적 의무다. 단지 위험 지역에 갔다는 이유로 보호 수준을 낮춘다면, 향후 전 세계 가혹한 비즈니스 현장과 분쟁 지역에서 국익을 위해 뛰는 우리 국민과 기업이 위기에 처했을 때 이 정부는 도대체 어떤 명분으로 그들을 지킬 것인가?
위성락 실장의 이러한 사고방식은 외교적 신중함이 아니라 국가의 존재 이유 자체를 부정하는 위험천만한 구조적 무능이다.
대통령의 단호한 원칙, 이제 안보 라인의 대대적 인적 쇄신으로 답하라
"원칙대로 해요. 도가 지나쳐도 너무 지나쳐요."
어제 이재명 대통령이 국무회의 등에서 보여준 이 단호한 한마디는 평화중견국으로서 대한민국이 지켜야 할 최소한의 자존심이자, 국민 주권의 원칙을 세우라는 준엄한 명령이다.
대한민국은 이제 강대국의 눈치나 보며 주눅 들어 있던 과거의 약소국이 아니다. 세계가 인정하는 경제·문화적 위상을 갖춘 평화중견국이다. 관료라면 마땅히 대통령의 실용적 주권외교 노선에 발맞춰 당장 이스라엘에 강력히 항의하고 우리 국민의 무조건적인 석방을 이끌어내야 했다.
외교와 안보는 불확실성을 핑계로 판단을 미루고 책임을 회피하는 영역이 아니다. "모르면 미루고, 불편하면 피하는" 자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한, 대한민국의 국격은 추락하고 다음에도 똑같은 외교 참사가 반복될 것이다.
위성락 안보실장의 즉각적인 퇴출은 과도한 요구가 아니라, 너무 늦은 최소한의 조치다. 대통령은 '실용'을 배반하고 '사대'와 안일에 빠진 외교·안보 라인을 대대적으로 정리해야 한다.
국민의 안전을 지키지 못하고 강대국의 눈치만 보는 외교는 외교가 아니라 구걸이다. 주권자의 명령에 당당히 부응하는 주체적 외교·안보 체제를 새로 구축하는 것만이 대한민국의 자존과 국익을 지키는 유일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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