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전 월드컵이 끝나고 대한축구협회(KFA)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왜 2006 월드컵에서 16강 진출에 실패했는가'에 대한 기자들의 성토 대회를 방불케했다. 하지만 한 기자의 질문에 기자회견장의 분위기가 일순간에 바뀌었다.
"다음 월드컵에 대비하기 위해 이번 월드컵의 실패를 어떻게 분석하고 기록으로 남길 것인가?" 이 질문을 듣고 솔직히 난 부끄러웠다. 한국 축구의 실패를 미래의 교훈이 아니라 현재의 결과로만 생각했던 것 같아서다.
최약체 남아공과 무기력한 졸전, 또 찾아온 '경우의 수' 고통
한국의 2026 북중미 월드컵 조 편성은 역대급으로 좋았다. 개최국 중 하나인 멕시코가 껄끄럽기는 했지만 유럽과 아프리카 지역에서 최하위권 팀인 체코, 남아프리카공화국(남아공)과 같은 조에 편성됐기 때문이다.
한국은 조별 예선 1차전에서 체코에 극적인 역전승을 거뒀다. 홍명보 감독 부임 이후 단 한 차례도 역전승이 없었던 대표팀은 이 승리를 계기로 순항하는 듯 보였다.
한국은 멕시코와의 경기에서 한 순간의 실수로 패했지만 분위기가 그리 나쁘지 않았다. 같은 조에서 최약체로 손꼽히는 남아공과 최종전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한국은 남아공과 무승부만 기록해도 32강 진출이 확정되는 상황이었다.
32강전 상대가 누가 될 것인지가 오히려 중요해 보였다. 한국이 조2위로 32강전에 진출하면 상대는 또 다른 월드컵 개최국 캐나다였다. 캐나다의 감독 제시 마시는 한국 대표팀 감독이 될 수 있었던 인물이었다. 제시 마시 감독은 연봉 조건이 맞지 않아 한국이 아닌 캐나다의 지휘봉을 잡았다. 캐나다와의 32강전이 성사된다면 한국에서 큰 관심을 끌 수 있었던 이유다.
하지만 한국은 25일 남아공과 시종일관 무기력한 경기를 펼친 끝에 0-1로 패했다. 자력으로 32강 진출 가능성은 사라졌다. 조3위로 32강전에 진출하려면 28일까지 다른 조 경기 결과를 지켜봐야 하는 신세가 됐다.
여전히 월드컵만 바라보는 한국 축구
남아공과의 경기가 끝난 뒤 한국 언론은 들끓었다. 손흥민을 선발 출전 시키지 않았으며 남아공 전에 대비한 전술적 준비가 없었던 홍명보 감독에 대한 비난이 특히 많았다.
이는 단순히 한국이 패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남아공 전은 월드컵 역사상 한국의 가장 무기력한 경기였지만 이렇다 할 감독의 전술적 변화가 눈에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부분은 '한국 축구는 20년 전과 도대체 뭐가 달라졌는가'이다. 외형상 가장 크게 달라진 부분은 유럽파 선수들의 수적 증가다. 현재 26명의 한국 대표팀 스쿼드 중에는 15명이 유럽에서 활약하고 있다. 한국은 해외 축구 팬들에게도 친숙한 손흥민(LAFC), 이강인(파리 생제르맹), 김민재(바이에른 뮌헨) 보유국으로 성장했다. 영국 축구 잡지 <월드사커>가 북중미 월드컵 특집호에서 한국을 '척추 라인'이 강한 팀으로 평가한 이유다. 최전방의 손흥민, 중원의 이강인, 중앙 수비라인의 김민재 때문이다.
20년 전과 특별히 바뀌지 않은 것도 많다. 여전히 한국 축구의 거버넌스는 월드컵만 바라본다. 월드컵 성적에 매몰돼 있다. 그러다 보니 대표팀 감독은 수시로 교체됐고 유소년부터 성인 대표팀까지 연결된 한국 축구의 공통된 비전은 없었다.
여전히 K리그가 펼쳐지는 그라운드의 잔디 품질은 크게 향상되지 않았고 프로 클럽은 고교 레벨의 유스 클럽을 직접 운영하지 못한다. 프로 클럽이 유스 지정고라는 명목으로 지역 고교 축구팀을 간접적으로 지원만 하는 구조다. 개인 기량 향상보다는 팀 성적에 집중해야 하는 한국 학원 축구의 특징도 달라지지 않았다. 월드컵만 바라 본 한국 축구의 비극이다.
공통된 비전으로 미래를 설계한 일본 축구
일본축구협회(JFA)는 2050년 월드컵 우승을 목표로 설정했고 빠르고 정교한 패스 축구를 특유의 축구 스타일로 규정했다. '꿈을 위한 용기'라는 슬로건도 발표했다. 일본 국가대표팀 트레이닝 센터 이름에도 '유메(꿈)'라는 단어를 넣었다.
일본 축구의 꿈은 만화 <캡틴 츠바사>에서 시작됐다. 1981년 <캡틴 츠바사>의 선풍적인 인기로 일본 초등학교에서는 전례가 없는 축구 붐이 불었다. 1980년 9만 명에 불과했던 초등학교 축구선수 수는 1989년에 25만 명 수준으로 늘어났다.
주인공 츠바사는 브라질을 거쳐 스페인 명문구단 FC 바르셀로나에 진출했다. 그의 목표는 일본의 월드컵 우승이었다. 츠바사의 포지션이 미드필더라 이 만화를 탐독했던 '사커 키드' 중에는 뛰어난 미드필더가 많이 나왔다. 나카타 히데토시, 가가와 신지, 혼다 게이스케가 대표적이다. 나카타는 "캡틴 츠바사를 보며 유럽 무대 진출의 꿈을 키웠다"고 했다.
축구로 '탈아입구'를 하겠다는 일본의 꿈은 2018 월드컵 이후 가속도가 붙었다. 당시 유럽 축구리그에서 활약했던 일본 선수는 채 40명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2025~2026 시즌에는 그 숫자가 100명을 넘어섰다.
2018 월드컵 16강전에서 일본은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이었던 벨기에에 2대0으로 앞서나갔다. 하지만 일본의 사상 첫 월드컵 8강 진출의 꿈은 곧 깨졌다. 높이의 우위를 앞세운 벨기에의 파상 공격에 일본은 무너졌다.
이 패배로 일본은 더 이른 나이에 더 많은 선수들이 유럽으로 나가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투쟁심과 체력적 준비가 결여된 아름다운 패스 게임만으로 월드컵에서 좋은 성적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교훈이었다.
JFA는 기존 유럽파 선수들의 관리는 물론 일본 유망주들의 유럽 진출을 측면지원하기 위해 독일 뒤셀도르프에 사무소를 설치했다. 북중미 월드컵에서 일본 대표팀의 유럽파가 23명이나 포함된 건 이처럼 우연이 아니었다.
심지어 일본은 이들이 유럽 무대에서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의미가 있다고 봤다. 유럽 무대를 경험한 선수가 귀국해 축구 지도자가 되거나 행정가가 되는 경우도 일본 축구의 자양분이 되기 때문이다.
잔디와 유소년 육성을 위한 장기 비전이 필요한 한국 축구
한국 축구의 미래는 누가 뭐래도 유소년 육성과 잔디 관리에 달려 있다. 이를 위해 KFA와 K리그가 유소년 육성 모델을 함께 논의해야 한다. 물론 유소년 육성 모델 수립은 쉽지 않다. '공부하는 학생 선수'와 '축구 유망주 발굴 및 훈련'이라는 2차 방정식을 풀어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학생 선수의 수업권 보장과 관련해 문체부와 교육부의 협력이 절실하다.
제대로 된 유소년 육성 모델 없이 축구 강국이 된 국가는 없다. 축구 굴기에 엄청난 재원을 쏟아 부었던 중국은 유소년 육성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여전히 아시아 축구의 변방에 머물러 있다.
반면 네덜란드는 확고한 유소년 육성 모델 덕분에 축구 강소국이 됐다. 네덜란드 클럽에서는 가능성 있는 선수의 월반을 권장한다. 자신의 연령대보다 높은 연령대 선수들과 뛸 수 있는 기회를 유도하기 위해서다. 23세 이하 선수들로 구성된 네덜란드 프로 팀의 용 클럽(Jong Club)은 프로 2부~4부리그에 편성돼 성인 선수들과 함께 경쟁한다. 실전 경험이 최고의 훈련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네덜란드는 축구 선수로 성장하지 못한 유소년 선수가 정상적으로 사회에 적응하도록 돕기 위해 교육 프로그램을 지역 학교와 연계해 제공한다. 대다수 유소년 축구 선수가 프로 무대에 진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프로그램 덕분에 유소년 선수들은 축구 선수로의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크지 않다. 네덜란드 인구 1800만 명 가운데 2.5%가 넘는 약 48만 명의 유소년 선수가 축구 클럽에서 땀을 흘린다.
잔디 품질은 패스 속도에 영향을 미친다. 일본 프로축구 J리그는 한국보다 고품질의 잔디 그라운드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패스 속도가 빠르다. 반면 K리그는 상대적으로 J리그에 비해 패스 속도가 느리다.
2024~2025 시즌을 기준으로 국제스포츠연구센터(CIES)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K리그에서 가장 패스 속도가 빠른 팀이 J리그로 가면 10위에 머무른다. 물론 여기에는 짧은 거리에서 패스 속도를 중시하는 J리그와 일본 축구 스타일이 작용했다. 하지만 좋은 잔디 환경이 뒷받침 되지 않는다면 J리그의 패스 속도는 이처럼 높을 수 없다.
월드컵 역대 최다 득점 1위 자리에 오른 리오넬 메시를 비롯한 수많은 스타를 배출한 바르셀로나의 유소년 아카데미의 이름은 '라 마시아'다. 카탈루냐어로 라 마시아의 뜻은 농장이다. 라 마시아는 규격화된 제품을 만드는 공장이 아니라 다양한 농작물이 성장하는 농장이다.
실제로 라 마시아는 다양한 체격 조건과 성향의 선수들을 키웠다. 하나의 큰 축구 철학을 바탕으로 유소년 선수가 좋은 환경에서 성장할 수 잇는 비옥한 토양을 일구는 데 한국 축구가 집중해야 하는 이유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