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예술은 전 지구적 차원에서 작동하는 신자유주의와 국민국가적 차원에서 작동하는 민주주의라는 정치적 환경 속에 놓여 있다. 이러한 조건에서 예술(가)는 기존 체제가 원활하게 작동하도록 하는 윤활유가 될 수도 있고, 반대로 다른 존재 방식의 가능성을 상상하게 하는 균열의 계기가 될 수도 있다. 파스칼 길렌의 <예술적 다중의 웅성거림>은 바로 이러한 예술(가)의 이중성에 주목한다. 저자는 예술 현장을 다양한 행위자들이 관계를 맺는 네트워크로 이해하면서, 세계화와 포스트포드주의 이후 문화·창조산업이 예술가의 이동성과 불안정성, 연결성을 어떻게 창의성과 자율성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해왔는지 비판적으로 분석한다. 더 나아가 예술가 역시 이러한 신자유주의 체제를 재생산하는 데 일정 부분 기여해 온 게 아닌가 하는 불편한 질문을 던진다.
길렌은 오늘날 예술이 신자유주의 체제와 전 지구적 차원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 설명하기 위해서, 부르디외의 '장(field)', 네그리와 하트의 '다중(multitude)', 라투르의 행위자-네트워크 이론 등을 바탕으로 예술사회학을 재구성한다. 그에게 예술 현장은 하나의 고정된 영역이 아니라 다양한 행위자들이 연결되는 네트워크다. 예술가는 독립적인 창조자가 아니라 관객, 기관, 제도, 자본, 정책 등 다양한 관계 속에서 구성되는 존재다. 특히 그는 '전 지구적 네트워크'라는 관점에서 예술계의 작동 방식을 분석하며, 민주주의 사회에서 예술이 수행해야 할 정치적·윤리적 역할을 함께 성찰한다.
이 책에서 가장 설득력 있는 논의는 오랫동안 이상화되어 온 '자유롭게 떠도는 예술가'라는 이미지를 비판하는 대목이다. 길렌은 세계화와 포스트포드주의 이후 문화예술 영역에서 강조되어 온 창의성, 유연성, 연결성이 역설적으로 신자유주의 노동 체계가 요구하는 삶의 양식이라고 말한다. 프로젝트 기반 노동, 끊임없는 네트워크 형성, 자기계발과 자기관리의 요구는 오늘날 예술 노동의 일상이 되었다. 노마드는 기존 질서에 속하지 않는 자유로운 존재처럼 '오인'되지만, 신자유주의 경제 안에서는 가장 효율적인 노동 주체의 존재형식이 된다. 자율성과 창의성이라는 언어는 불안정한 노동 조건을 정상화하는 수사로 기능하고, 동시대 예술가들은 유목 담론에 매료되어 노마드에 긍정적 특성을 부여하며 미학화하기도 하였다.
그는 이러한 노마디즘의 정치적 함정을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그러나 그들이 무국적자의 운명, 로마인의 고통, 그리고 난민의 비참함과 자신을 동일시하거나, 정치적 판단을 내리지 않고 분쟁 지역을 통과할 때, 그들의 태도는 의심스러워진다. 그럴 경우 그들의 공감과 '참여'는 오로지 자신들의 예술적 이점을 얻고, 그로 인해 자기 자신을 풍요롭게 하는 수단으로만 기능할 뿐이다. … 그들의 작품이 아무리 유목적이고, 참여적이고, 정치적으로 급진적인 것처럼 보일지라도, 궁극적으로는 신자유주의적 전쟁 기계에 사로잡혀 있게 된다. 그러면 유목적인 모험은 개인적 자기-충족 외에 아무것도 아니게 되며, 유목적 수사는 편리한 마케팅 전략에 지나지 않게 된다.(159~160쪽)"
오늘날 국제교류와 네트워킹은 문화예술계에서 중요한 상징자본이자 인정체계로 기능한다. 그런 점에서 길렌의 의심과 비판은 날카롭다. 그의 질문은 결국 "유목적 존재의 미학화가 사실상 포스트포드주의의 작업 환경을 포함한 지배적인 신자유주의 헤게모니에 봉사하는 것은 아닌"가(147쪽) 라는 물음으로 귀결된다.
그의 의심에 한 가지 질문을 덧붙여 보고 싶다. '유목적 존재'로서 예술가들은 정말 노마디즘에 매료되어 '이동'을 선택하는 것일까. 예술가의 이동 경험은 단순한 자유를 향한 선택이라기보다 환대와 추방을 경험하는 과정에 가깝다고 해석할 수 있다. 어느 장소에서는 초대받지만, 다른 장소에서는 배제되기 때문이다. 국제교류와 레지던시, 프로젝트 기반 활동은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지만 동시에 예술가가 어떤 제도와 조건 속에서만 이동하고 환대받을 수 있는지를 드러내기도 한다. 예술가에게 이동은 자유의 상징이라기보다 자신의 위치성을 확인하게 되는 정치적 경험의 계기일 수 있다.
길렌의 문제의식은 예술가들이 어떻게 신자유주의 체제에 포섭되고, 나아가 그 체제를 재생산하는 데 기여하는지를 비판하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그는 체제 안에서 다른 존재 방식을 상상할 수 있는 예술의 가능성을 탐색한다. 그가 이러한 가능성을 설명하기 위해 제시하는 개념이 바로 책의 제목이기도 한 '예술적 다중의 웅성거림(murmuring)'이다.
"웅성거림은 (물론 여기에는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겠으나) 미약한 형태의 저항일 수 있다. 이 경우 웅성거림은 의식적이든 아니든 경제적 혹은 미디어적 논리에 포섭되기를 거부하는 태도를 표명한다. 즉, 해당 영역 내에서 생존 가능한 힘이나 잠재적인 창조적 동력이 되기를 원치 않는 것이다. … 한편으로는 '할 수 없음(can't)'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하고 싶지 않음(don't want to)'으로 말이다."(22쪽)
웅성거림이 거대한 선언은 아니다. 그러나 모든 정치적 변화는 때때로 이름 붙여지기 이전의 작은 소리에서 시작된다. 파스탈 길렌은 웅성거림을 명확한 정치적 선언이나 효과적인 전략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할 수 없음(can't)"과 "하고 싶지 않음(don't want to)"(22쪽) 사이에 위치하는 미세한 거부에 가깝다. 이 지점은 예술 현장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망설임과 거리두기의 경험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다만 웅성거림은 매력적인 은유이지만, 그것이 실제 예술 현장에서 어떻게 정치적 가능성이 되는지는 더 설명될 필요가 있다. 예술 현장에서 발생하는 긴장과 불만, 작은 거부들은 언제 균열이 되는가. 단순한 생존 전략과 체제에 대한 저항은 어떻게 구분되는가.
파스탈 길렌은 예술가에게 더 급진적이 되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이동과 참여, 창작이 어떤 질서에 포섭되는지를 끝없이 의심하라고 말한다. 다만 여기에서 하나의 질문이 남는다. 그렇다면 오늘날 예술가는 어떻게 포섭되지 않으면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가. '웅성거림'은 가능성을 열어주지만 동시에 그것만으로 충분한가라는 질문 역시 여전히 남는다.
예술적 다중의 웅성거림이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그것을 해석하고 연결하는 관계적 조건이 필요하다. 길렌은 그 역할을 민주시민에게 부여한다. 예술적 다중은 시민들로 하여금 자신의 삶 속에 존재하는 미세한 균열과 가능성을 감각하게 만든다. 예술적 다중은 직업 예술인의 범주를 넘어,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고 관계 맺으려는 모든 존재 방식으로 확장될 수 있다. 그렇기에 '웅성거림'은 체제 밖으로 완전히 벗어나는 언어가 아니라 체제 안에 머물면서도 그 논리에 완전히 동화되지 않으려는 가장 작은 실천으로 읽힌다. 오늘날 예술이 해야 할 일은 더 크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아직 말해지지 못하고 있는지를 감각하고, 그 미세한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일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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