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도부터 게임을 개발해 온 스다 고이치(須田剛一) 감독은 작가주의적 색채가 유난히 강한 일본 게임업계의 또 다른 거장이다. 다만 <바이오하자드> 시리즈의 미카미 신지(三上真司)나 <메탈 기어> 시리즈의 코지마 히데오(小島秀夫)와 달리, 그의 작품들은 대중적 인기와는 한참 거리가 먼 컬트적 영역을 확보하고 있다. 특히 감독의 명성과 게임의 규모가 한참 커진 지금조차 그는 자신만의 외길을 걷고 있다. 예를 들어 코지마 감독의 게임도 동서양을 막론하고 주류와 비교해선 독특한 것으론 내로라하지만, 스다의 게임과 비교하면 여전히 익숙한 문법을 경유한다. 그만큼 스다 감독의 게임은 파격적이며 낯선 경험을 선사한다.
고이치라는 이름이 일본어로 숫자 51과 발음이 같다는 점을 이용해 스다 감독의 이름은 '스다51'로도 표기하는데, 이 스다51의 신작 <로미오 이즈 어 데드 맨>이 2026년 발매되었다. 본작의 주인공 '로미오 스타게이저'는 미국 펜실베이니아주의 어느 작은 마을에서 보안관 보조로 일하다가 도로에 쓰러져 있던 기억을 잃은 한 여성 '줄리엣'을 우연히 발견해 구하게 되고, 둘은 결국 사랑에 빠지게 된다. 줄리엣은 로미오에게 함께 마을을 떠나자고 설득하고 그렇게 그녀와 도망치려던 당일 로미오는 하얀 악마에게 습격당해 얼굴 반쪽이 날아가 죽음을 맞는다. 하지만 로미오의 할아버지이자 천재 과학자인 '벤자민 스타게이저'가 '데드 기어'라는 장치를 로미오의 반파된 얼굴에 박아 넣고 그렇게 죽었던 그는 다시 살아나 '데드 맨'이 된다. 게임은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1597년 비극 <로미오와 줄리엣>으로부터 거의 반백 년의 시간을 거슬러 원작은 거의 알아 보지도 못할 만큼 기이한 형태로 잔뜩 뒤틀어 이 오랜 사랑 이야기를 무대에 올린 작품 속에서 스다51은 과연 어떤 기상천외한 경험을 선사할까?
부조리 회고전
<로미오 이즈 어 데드 맨>은 스다51의 게임이라는 것만으로 충분히 비주류적인 표현 방식을 펼치지만, 그의 작품들의 계보상에 놓고 보면 '새로운' 기법을 소개하진 않는다. 우선 대표적으로 핵 앤 슬래시라는 장르는 스다 감독을 전세계에 가장 널리 알린 유명 시리즈 <노 모어 히어로즈>에서 이미 기용했던 것이며, 3D 게임 안에 2D 애니메이션, 미니어처, 미국식 코믹스 페이지 등을 삽입하는 서로 다른 매체의 혼합도 1999년도 작품 <실버 사건>에서부터 사용했던 기술이다. 작품 내에 주요 장르와는 변별되는 서로 다른 여러 미니 게임들이 존재하는 것 또한 그의 이전 게임들에서 자주 찾아볼 수 있는 요소이다. 나아가 2005년도 게임 <킬러7>에서부터 사용했던 그 특유의 상징적인 셀 셰이딩 렌더링 기법과 비교하면 <로미오 이즈 어 데드 맨>의 전반적인 3D 그래픽은 상당히 평범한 '리얼리즘' 양식에 속한다.
이는 갑작스러운 변화가 아니다. 본래 3편까지 진행된 <노 모어 히어로즈> 시리즈의 변천사를 살펴보면 렌더링이 점점 발전하지만 또 한편으론 평범해지는 게 여실히 느껴지는 바였지만, 이번작에서 마침내 그 종착점에 도달한 느낌이다. 그리고 <노 모어 히어로즈> 이후 스다51 게임은 폭력의 묘사를 우스꽝스러울만치 과장했고 따라서 사실적이라는 느낌과는 거리가 멀었는데, 이번 작에선 적들마저 인간이 아니라 유사-좀비와 같은 존재들이다보니 유혈이 낭자하는 양에 비해선 그다지 잔인하다는 인상은 아니다. 자주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던 여성 인물들의 노골적 성적 대상화도 이번작에선 흔적을 감췄다. 따라서 스다의 작품 세계 속에서 오히려 <로미오 이즈 어 데드 맨>은 좀 덜 충격적이며, 심지어는 온건한 위치를 점하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처럼 어딘지 맛이 순하게 중화된 느낌은 스다51이 과거에 부렸던 모든 재주를 본작이 총집합하고 리믹스한 결과인 것으로도 느껴진다. 스다는 원래 이전작의 요소를 다시 차용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다. <실버 사건>과 <꽃과 태양과 비와>, <킬러7>은 UI의 테마를 공유하고, <노 모어 히어로즈>와 <킬러 이즈 데드>는 장르 및 렌더링 기법을 공유한다. 그리고 폭력이라는 주제와 달의 상징, '몬도'라는 이름 등 특정 요소들을 반복적으로 사용하는 것 또한 감독의 전매특허였다.
하지만 <로미오 이즈 어 데드 맨>은 스다51이 원래 일하던 휴먼(ヒューマン)사에서 독립해 나와 자회사 그래스호퍼 매뉴팩처(Grasshopper Manufacture)를 차린 이후로 만든 거의 모든 주요한 게임들의 요소를 전부 소환해 냈다. 전반적으로 원색의 8비트 픽셀들로 구성되어 있는 UI 디자인과 효과음은 <노 모어 히어로즈>로부터 그대로 계승했으며, <퐁>과 <팩맨> 등 고전 양식을 빌려온 미니 게임들도 해당 시리즈에서 이미 이식되었던 바이다. 또 보스를 항상 레슬링 기술로 마무리 짓는 것도 <노 모어 히어로즈>에서 이어지는 연출이다. 검과 총을 번갈아 사용하는 핵 앤 슬래시 액션은 <킬러 이즈 데드>에서 사용되었던 체계이다. <실버 사건>의 인물인 '코다이 스미오', <실버 사건 25구>의 주인공 중 한 명인 '시로야부', 단편 <적과 청과 녹과>의 주인공 중 한 명이자 <노 모어 히어로즈 3>의 보스인 '미도리카와 미도리'는 아예 각각 NPC들로 등장하는데, 특히 시로야부와의 대화 창에선 UI가 <실버 사건> 특유의 '필름 윈도우' 형식으로 전환된다. 최종 보스의 이름인 '야쿠모(89mo)'는 <킬러7>에서 서사를 추동하는 기밀 문서 '八雲'였다.
<로미오 이즈 어 데드 맨>은 그가 자주 비견되었던 두 영화 감독, 쿠엔틴 타란티노(Quentin Tarantino)와 데이비드 린치(David Lynch)와의 유사점마저 만나게 했다. <노 모어 히어로즈> 이후의 스다51은 미국과 일본의 20세기 B급 문화를 노골적으로 차용한다는 점에서 쿠엔틴 타란티노에 자주 비견되었다(하지만 스다는 영화 중간에 애니메이션이 삽입되었던 2003년도 영화 <킬 빌>보다 매체의 혼합을 적극적으로 기용한 건 자신의 <실버 사건>이 먼저라는 입장이다. 그리고 물론 일본인인 스다와 미국인인 타란티노의 국적은 서로 반대되므로 그들이 각국의 문화와 관계하는 방식도 상반된다). <킬러 7>의 초현실적 누아르 분위기는 데이비드 린치에 비견되었다. 특히 파편화되고 분절된, 서로 이어지지 않는 듯한 대화와 상황과 장면들이 린치의 영화와 공명했다. <로미오 이즈 어 데드 맨>에서 두 시절의 미학이 융합되는 가장 대표적인 지점은 반복적으로 전형적인 미국식 '다이너' 식당을 비추는 장면들이다. 이 장면들은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의 유명한 1942년 유화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의 구도를 그대로 재현하고 있는데, 이 그림 속에 등장하는 '다이너' 식당은 린치와 타란티노 양쪽 감독 모두에게 하나의 상징과도 같은 무대다.
아방가르드나 신비주의라고 할 수 있는 자신의 양식을 스다51가 집대성하려 한 것도 그의 33년 경력을 돌이켜 보면 '올 것이 왔다'라는 느낌이다. 다만 어떤 연출들은 2026년에 이렇게 커다란 규모의 게임에서 실현하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기상천외하며, 기존 문법을 벗어나는 걸 넘어 직관에 반하며 불합리하기까지 하다. 우선 컷신 진행 중 시간에 맞춰 특정 버튼을 누르는 것으로 성공/실패 여부를 결정하는 QTE(퀵 타임 이벤트)는 게임 업계의 주류에서 이미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지 한참도 더 지났지만 스다51은 여전히 부끄러운 기색도 없이 뻔뻔하게 플레이어에게 화면에 나타난 버튼을 누르도록 지시한다. 그리고 게임을 시작하자마자 분명히 게임 안에서 플레이어가 직접 플레이하게 해야 했을 듯한 내용들과 마치 컨셉트 아트 단계에서 고안되었을 듯한 보스 디자인들을 플래시백 몽타주로 보여주며 '이들과는 이미 싸웠다'는 식으로 아무렇지 않게 넘어가는 컷신을 보면 그저 어처구니가 없을 따름이다. 몇몇 보스전은 난이도의 문제가 아니라 패턴 자체가 그저 불합리하게 구성되어 있다. 아직 게임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자꾸 크레딧을 송출한다. 그리고 여기까지 전부 전작들에서 사용되었던 요소이다.
이렇게 불합리한 자기 참조는 NPC '워스트핑크'와의 문답 장면에서 절정에 달한다. 여기선 세 개의 선택지가 주어지고 플레이어는 그 중에서 하나를 골라야 한다. 놀랍게도 게임 내 아무런 단서도 없는 이 99개의 질문 중 하나라도 틀리면 그전까지의 대답을 처음부터 다시 맞춰야 한다. "친구가 울고 있을 때 주인공 로미오가 취할 반응" 같은 경우는 무난한 축에 속하고, "탄막 슈팅 게임 <도돈파치> 시리즈 최고의 작품"을 맞추라는 지점에선 도통 기가 차지 않을 수 없다. 이는 고전 게임 특유의 불합리함을 떠올리게 하는데, <메탈 기어 솔리드 3>의 리볼버 30초 저글링 장면이나 사다리 2분 등반 구간 같은 사례도 이 앞에선 그 괴팍함의 빛이 바랜다. 이 99개의 문제 전체를 푸는 데에는 답을 하나도 틀리지 않았더라도 대략 20분가량이 걸리니 말이다.
<로미오 이즈 어 데드맨>의 괴팍함이 떠오르게 하는 건 1986년도 <타케시의 도전장>의 불합리이다. 99개 문답은 본래 <실버 사건>에서 제시되었던 100개 질문을 호출하는 패악질인데, 여기서 문제를 다 풀고 나면 본부장은 주인공에게 '점수는 네 마음 속에 있다'며 답을 몇 개 맞췄는지 알려주지도 않고 그냥 넘어가 버린다. 이처럼 살다 보면 세상엔 그런 일도 있다는 식의 뻔뻔하기 짝이 없는 태도는 다른 한편으론 플레이어를 만족시켜야 하는 소비자로 간주하는 게 아니라 도전과 시험을 던질 (말하자면 예술의) 감상자로 여기는 것이다. 다시 말해 <로미오 이즈 어 데드맨>이 되짚는 스다51의 발자취는 부조리극의 여로이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를 시대가 변하고 기획의 규모가 달라졌음에도 견지할 수 있는 그 타협 없는 고집은 이 작품을 어엿한 한 예술가의 회고전으로 만든다.
코로나 이후 부서진 시공간
<로미오 이즈 어 데드맨>에 감독의 전작들이 이렇게 총집합하게 된 것은 단연 기념비적인 취지에 그치지 않는다. 시간대를 넘나는 자기 참조가 여기 모인 건, 스다의 작품들에서 종종 다루어지곤 했던 시공간의 균열이라는 주제와 관련이 있다. 본작에서 괴짜 천재 과학자 할아버지와 함께 과거로 모험을 떠난다는 설정은 <백 투 더 퓨처>에서 직접적으로 빌려온 것이다.
서양, 특히 미국 문화에 대한 직접적인 참조는 스다51 뿐 아니라 코지마 히데오, 아라키 히로히코(荒木飛呂彦) 등 많은 일본 창작자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기법이다. 다만 일본 문화에 관심을 가지는 서양인들의 오리엔탈리즘과 다른 점은 이들이 단순히 문화의 부분적 요소나 표상만 절취해 가는 것이 아니라, 미국의 역사와 정치를 진지하게 고민한다는 것이다. 그 유명한 <언더테일>의 창작자 토비 폭스(Toby Fox)는 일본 문화를 완벽하게 승화한 미국인 작가로 꼽히지만, 그렇다고 그가 작품 내에서 일본 사회를 비평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언급한 세 명의 일본 작가들은 어째 미국의 역사 및 사회, 정치, 문화에 미국인들보다도 더 큰 관심을 가지는 듯하다.
스다51의 경우 9·11 사건 이후 미국에서 벌어진 테러리즘과의 전쟁을 <킬러7>에서 직접적으로 비평했다. 뿐만 아니라 미·일 간 긴장 관계, 미국의 선거 제도 등에 대한 문제도 해당 작품에서 주요하게 다루었다. 그가 미국으로 눈을 돌리기 전엔 일본 자국의 사회 문제에 집중하고 있었다. 전형에서 한참 벗어나 불친절하기로 소문난 그의 '악명'을 널리 알린 <트와일라잇 신드롬>, <문라이트 신드롬>, <실버 사건> 등 90년대에 그는 당시 일본 사회를 뒤흔들었던 여러 자살 및 살인사건들에 대한 문제 의식에서 출발해 작품들을 창작했다. 다시 말해 스다는 단순히 타국의 문화에 흥미 본위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자기 자신의 현실을 성찰하기 위해 그것들을 참고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번 <로미오 이즈 어 데드맨>에서 스다51이 <백 투 더 퓨처>를 참조한 그 저의는 무엇일까? 이 게임의 주인공 로미오는 오컬트와 음모론에 푹 빠져 있는 청년인데, 그가 설파하는 음모론 중엔 세계 경제 포럼 다보스 회의에서 새로운 병원균을 퍼뜨려 인구를 조절하려 한다는 이야기도 있다. <킬러7>에서도 유사한 음모론이 등장했었는데 이때는 사스(SARS) 바이러스의 확산에 영향을 받은 걸로 보인다. 20년이 흘러 다시 이 음모론이 등장한 배경은 <로미오 이즈 어 데드맨>이 공공연히 2019년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바로 미루어 보아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사태인 듯하다.
무엇보다 게임은 2019년에 전세계의 시공간이 갈라졌다는 서술과 함께 시작한다. 코로나 이후 산산조각 난 모두의 일상이 아직도 영향을 미치고, 그 거대한 파열 이전으론 영영 돌아갈 수 없게 된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2022년도에 『심리 외상(Psychological Trauma)』 학술지에 기재된 캘리포니아 대학의 연구, 『현상학과 인지과학(Phenomenology and the Cognitive Sciences)』지에 기재된 쟝 니코 (Jean Nicod) 연구소와 트리니티 칼리지 간 협업 연구 등 여러 곳에서 공통적으로 팬데믹 이후 사람들이 시간 왜곡 현상을 경험하는 것을 보고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어떤 외상적 사건은 개인에게 시간 감각의 왜곡을 낳기 마련이지만, 코로나는 세계가 공유한 붕괴의 경험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특히 9·11과 이라크 전쟁 이후 게임 지형이 완전하게 달라졌듯이 감염병과 그에 따른 광범위한 격리 조치의 경험도 확연히 게임계의 풍경을 바꿔놓았다.
<로미오 이즈 어 데드맨>도 이러한 조류의 연장선이며, 작금의 '뉴 노멀'에 대한 스다51의 직접적 응답이기도 하다. 작중에서 등장하는 외계물질 '에메랄드 플로우전'과 '센트레이'부터가 명백하게 병원균을 연상시키는 형상을 하고 있다. 다시 말해 본작에서 스다의 게임들이 유난히 전부 모여 뒤섞인 건, 코로나 이후 조각난 시간 감각을 전면으로 드러내고자 한 결과다.
할아버지의 기술로 되살아난 이후에 로미오는 'FBI 시공간 경찰'의 섭외를 받게 되고, 시공간 붕괴를 일으킨 혐의로 수배를 받는 줄리엣을 쫓기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1983년, 1968년, 1992년, 1978년, 2000년 등지를 종횡무진한다. 그리고 남북 전쟁, 노예 제도, 정신 질환자 수용 시설, 사이비 종교 등 지금도 미국, 그리고 우리에게 아직도 자꾸만 되돌아오는 그 역사의 끔찍한 유령들과 마주한다.
유령은 인격을 가진 개인으로서만 출몰하는 게 아니라 하나의 공간의 모습으로도 구현된다. 이 공간들은 같은 공간의 서로 다른 시간대의 형상들로 나타나기도 하며, 때론 한 공간에 여러 공간이 겹쳐 있기도 하다. 겹쳐 있는 공간 사이를 이동하는 매개는 바로 TV인데, TV는 스다51의 전작들에서도 영혼, 잔류 사념이 이동하는 관문으로서 줄곧 사용되어 왔다. 게임을 진행하기 위해선 전투보다 오히려 퍼즐 해결이 중요할 때가 많은데, 이 퍼즐의 배치된 경로가 마치 전시관이나 어트랙션의 설계처럼 플레이어로 하여금 공간 전체를 골고루 구석구석 살펴보게 만들도록 짜여 있다. 백화점, 시청 등 시대의 색깔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이 공간들이 세밀하게 구현된 것에 반해 그 안에 살아있는 인간이 단 한 명도 없는 풍경은 익숙하고 친근하면서도 낯설고 섬뜩한 리미널 스페이스를 구성한다.
과거를 죽여라
이 과거의 유령들과 마주한 로미오는 그들을 한 명씩 죽여 나간다. "과거를 죽여라(Kill The Past)"는 스다51의 게임 세계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이다. 앞선 게임에서 등장했던 코다이, 시로야부, 미도리카와 등의 NPC들도 전부 자신만의 이야기에서 과거를 죽이는 사건과 마주했다. 동일 인물을 서로 다른 작품에서 다른 역할에 배정시키는 것은 데즈카 오사무(手塚治虫) 만화의 스타 시스템으로 대표되는 기법이다. 전혀 다른 시간대에 걸처 등장 인물들의 이름과 주제를 반복해서 사용하는 건 마치 그들을 절대적이고 불변하는 본질을 가진 고유한 인물로 취급하기보단 상황에 맞춰 역할을 수행하는 배우들로 간주하는 듯하다. 알다시피 배우는 역할을 바꾼다 해도 항상 스스로의 동일한 얼굴을 운반하지 않는가? 한때 자신만의 서사를 가졌던 인물이 다음 작품에선 그저 단순한 기능을 수행하는 NPC로 전락하는 건 그들이 기표에 불과하다는 것을 시사한다. 부서진 시공간 속에서 인물들은 임의적으로 의미가 등록된 기표들, 단어들처럼 그때그때 어떤 역할이든 맡을 수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한 작품 안에서도 죽었던 인물이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살아나고, 제4의 벽은 부수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 아랑곳 않는 스다 작품의 특징을 고려하면 그가 만들어낸 세계가 부조리극의 무대라는 것이 더욱 확연해진다. 그는 내가 그렇다고 쓰면 그렇게 된다는 걸 너무나 생생히 인지하고 있는 연출가이다.
스다51의 부조리극은 시적 언어를 통해 시간의 순환을 그린다. 작품끼리 서로가 서로를 참조하는 것은 그것들이 각자로서도 작동하지만 전체로 묶어서 봤을 때 더 입체적으로 새로운 맥락을 구성하는 하이퍼텍스트이자 한 권의 시집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전혀 다른 게임성을 가지고 있어 알아보기 힘들지만 전부 같은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음이 명백한 스다51의 작품들은 그의 시적 세계관을 형성한다. 스타 시스템에 등용된 인물들과 공통 주제, 상징 등은 운율을 이루며, 반복되는 시간성을 드러낸다. 스다의 게임에서 빼놓지 않고 등장하는 달과, <문라이트 신드롬>에서 출현했던 태양신 '미트라'는 그가 해와 달을 움직이는, 즉 시간을 흐르게 하는 순환의 신화를 구현할 것임을 일찍이 예고했다. 같은 인물이 여러 역할을 취하는 것과, 같은 게임 세계의 렌더링이 3D에서 2D로, 또 탑다운에서 횡스크롤로 계속 뒤바뀌는 것 모두, 서로 다른 모습의 여러 화신으로 끊임없이 변화하며 현현하는 인도의 신들을 떠올리게 한다.
스다51의 게임은 소위 '떡밥'을 절대로 회수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한데, 떡밥은 서사에선 맥거핀이라 불리지만 신화에선 도상이며 시에선 심상으로 통한다. 신화에서도 시에서도 현상과 사건과 이미지만 존재할 뿐 설명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인물 뿐 아니라 사건조차 결국 서사보단 이미지를 구성하는 것이다. "시는 단어와 단어가 충돌하는 일. 시란 충격으로 형태를 세우는 노력. 그건 단지 그 말들이 내포하는 추상적인 의미가 우연히 드러난 것에 불과하다"라는 TV 속 남자의 선언은 마치 이 게임 자체의 작법을 고백하는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로미오 이즈 어 데드맨>은 스다51의 시집을 묶는 책등 역할을 한다 볼 수 있다.
시집 속에서 형식은 끊임없이 변주되며 다른 내용을 담고 이 내용 속에서 주제도 또한 다시 변주된다. 주인공 로미오의 서사는 <킬러 이즈 데드>의 여정과 가장 유사한데, 이는 해당 게임의 이야기를 우주의 순환이란 관점에서 재맥락화한다. <킬러 이즈 데드>와 <로미오 이즈 어 데드맨>은 종국에 미래의 자신을 죽이고 결국 또 자신이 그 자리를 계승하는 구조를 공유한다. 사냥꾼이 사냥감이 되는 순환 회로 속에서 죽지 않은 과거는 바로 로미오 자신이었던 것이다. '과거를 죽여라'라는 말 속에 과거를 영원히 죽이는 과정에 갇히게 되는 운명이 들어 있다. 과거를 죽인 내가 또 하나의 과거가 되니까. 하지만 스다51은 이 과정 자체를 미래로 나아가고자 하는 끝없는 움직임이자 추동으로 표시한다. 과거를 완전히 죽이는 데 성공하고 맞게 되는 영원하고 정적인 행복의 낙원은 세상의 끝, 즉 그 자체의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래서 그의 게임에 해피 엔딩은 없다. 그는 생생한 삶을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삶이 좋은 것이란 얘기는 안 했다. 스다의 운명적 순환이 드러나는 또 하나의 대표적 구조는 자주 배경이 되는 관료주의적 집단 체계이다. <실버 사건>의 경찰, <킬러7>의 정부, <로미오 이즈 어 데드맨>의 시청. 전부 역할은 정해져 있고 사람들은 돌아가며 그 자릴 채울 뿐이며,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 견고한 구조를 영속시킨다. 시장이 된 줄리엣은 이렇게 말한다. "공무란 건 말이지... 사람들의 이마에 낙인을 찍고 그들의 심장을 손에 쥐는 거야..." 스다51은 프란츠 카프카가 그러했듯이 관료주의 속에서 역사와 권력과 폭력과 생과 사, 그리고 우주의 잔혹함이 공명하는 것을 본 듯하다.
'과거를 죽여라'라는 말은 과거가 아직 살아 있다는 얘기다. 스다51에게 이 말은 영원성을 포함한다. 그것이 그가 30년 넘게 과거를 죽이라고 염불을 외고 있는 까닭일 테다. 여기서 과거는 그 자체로 죽여야 하는 것이며 죽기로 예정되어 있는 것이고, 죽였는데도 계속 살아 있는 것이다. 죽여도 죽여도 살아 있는 죽은 남자, 데드 맨, 로미오처럼.
구글에서 프레시안을 더 자주 만나기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