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료들이 사표를 던진 자리에서 그는 펜을 들었다
2026년 봄, 영국에서 『반헌법행위자열전』 4권을 펼쳤다. 정명래(鄭明來, 1931~) 항목에서 가장 압도적인 장면은 1964년 제1차 인혁당 사건이다. 서울지검 공안부장과 담당 검사 3명이 "증거가 없어 검사 양심상 도저히 기소할 수 없다"며 집단으로 사표를 던졌다. 검찰총장까지 나서 압박했지만 그들은 끝까지 거부했다. 그런데 그 거부의 자리를 메운 사람이 있었다. 서울지검에 발령받은 지 4개월 된, 사건현장에는 가보지도 않은 검사 정명래였다. 그는 중앙정보부의 송치의견서를 그대로 베껴 26명 전원을 기소했다.
동료들이 양심을 지키며 떠난 자리에서, 그는 그 자리를 채웠다. 이것이 정명래라는 인물이 한국현대사에 남긴 가장 상징적인 장면이다.
1931년 충북 청원 출생, 7년 동안 지방을 떠돈 무명 검사
정명래는 1931년 5월 26일 충청북도 청원에서 태어났다. 1954년 서울법대를 졸업하던 해 제6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했다. 1957년 검사로 임용된 뒤 청주, 대전 강경, 춘천 강릉·원주, 인천, 전주 군산·금산 등 지방을 7년 가까이 떠돌았다. 화려한 출발이 아니었다.
세계사 속의 동류, '거부당한 빈자리를 채운' 사람들
영국에서 이 장면을 들여다보면 비슷한 구조가 떠오른다. 소련의 대숙청(1936~1938년) 시기, 양심 있는 검사나 판사가 기소를 거부하면 체제는 곧바로 더 순응적인 인물로 대체했다. 거부한 사람은 영웅이 됐지만, 그 빈자리를 채운 사람은 체제의 진짜 도구가 됐다. 정명래가 바로 그 자리를 채운 사람이었다. 검사 이용훈(1932~2018)이 "증거가 없어도 기소하라는 말씀이냐"며 검찰총장에게 항의하던 그 순간, 정명래는 조용히 공소장을 작성하고 있었다.
1964년 제1차 인혁당 사건, "어떻게든지 해보아야 할 것이 아니오"
1964년 8월 14일, 중앙정보부장 김형욱(1923~1979)은 "인민혁명당(인혁당)을 적발해 57명 중 41명을 구속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사건을 송치받은 공안부장 이용훈과 검사 3명은 "혐의 내용을 입증할 증거가 없다"며 거부했다. 서울지검장 서주연(1920~1979)이 "정부의 위신은 뭐가 되고, 정보부의 위신은 또 어떻게 된단 말이오?"라며 언성을 높였지만 소용없었다. 법무부 차관 권오병은 "빨갱이 사건에 일일이 증거 운운할 수 있느냐? 중앙정보부에서 자백 받은 대로 기소하면 된다"고 했다. 검찰수뇌부 전체가 거부당했다.
그때 숙직 검사였던 정명래에게 지시가 내려졌다. 그는 거부하지 않았다. 피의자 근처에도 가보지 않고 중앙정보부의 송치의견서를 그대로 베껴 26명 전원을 기소했다. 이 행위에 대해 『반헌법행위자열전』은 "검사동일체 원칙을 오용한 대표적 사례"라고 명시한다. 1심에서 13명 중 단 2명만 유죄, 나머지는 무죄가 선고됐다. 조작이 그대로 드러난 셈이었다.
김형욱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혼란한 상황일수록 부하를 채용하는 기준은 능력 위주에서 충성심 위주로 바뀐다."
그리고 정명래를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 부국장으로 발탁했다. 양심을 지킨 검사들은 흩어졌고, 맹목적으로 충성한 검사는 승진했다.
1969년 박노수·김규남 사건, 난수표 대신 현미경, 암호 대신 역사책
중앙정보부 부국장이 된 정명래는 1969년 박노수·김규남 유럽거점 간첩단사건의 조작을 지휘했다. 검찰이 제시한 증거가 황당했다. 박노수에게는 난수표가 아니라 난수표를 보는 데 쓰였다는 현미경, 김규남에게는 암호표 서적이라며 제시한 것이 그냥 『한국사』 책이었다. 거기 7글자가 적혀 있다는 것이 전부였다. 두 사람은 사형을 선고받았고, 1972년 7·4남북공동성명 직후 사형이 집행됐다. 2015년 대법원 재심에서 무죄가 확정됐다. 사형집행 43년 만이었다.
1973년 윤필용 사건, 야당 의원 13명, 먼지털이식 수사
1972년 유신 직후, 박정희는 보안사령관 강창성을 불러 야당 국회의원 17명의 명단을 짚으며 "잡아다 철저히 조사하라"고 지시했다. 보안사는 13명의 야당 국회의원을 불법연행해 보복성 폭행과 고문을 가했다. 검찰에 송치된 5명에 대해 공안부장 정명래는 검사 7명을 투입해 "먼지 털이 식" 수사를 벌였다. 구속영장은 정명래가 직접 청구했다.
1973년 남산 부활절예배, "10만 군중이 KBS를 점령한다"는 공소장
1973년 정명래는 박형규(1922~2016) 목사 등이 부활절예배에서 플래카드를 들었다가 경찰에 제지된 것을 "내란예비음모"로 조작 발표했다. 실제로는 경비가 삼엄해 플래카드도 펼치지 못한 사건이었다.
1973년 김지하 「오적」, 시판 중단과 압수수색
같은 해 시인 김지하(1941~2022)의 「오적」이 발표되자 정명래가 부국장으로 있던 중앙정보부 5국은 즉각 시판을 중단시켰다. 야당 기관지가 전문을 게재하자 신민당사를 압수수색해 10만 부를 압수했다.
김대중 납치 사건, 박영복 부정대출, 권력을 위해선 은폐했다
1973년 김대중 납치 사건 특별수사본부장을 맡은 정명래는 사건의 실체를 완전히 은폐했다. 박영복 부정대출 사건에서도 권력형 부정부패 내용을 덮었다. 야당 정치인은 먼지 털이로 수사하고, 권력의 범죄는 은폐하는 이중기준이 정명래의 검사생활 전체를 관통했다.
네 번의 유죄판결, 비리법조인으로 전락
검찰을 떠나 변호사가 된 정명래는 노년에 사기, 공갈 등 혐의로 네 번이나 기소돼 유죄판결을 받았다. 1997~2000년 법정구속까지 당했다. 권력에 충성하던 손이, 결국 자신의 이익을 위해 법을 어겼다.
영국에서 2026년을 생각한다
영국에서 소련 대숙청의 역사를 가르칠 때 가장 중요하게 다루는 것이 "거부한 자와 그 자리를 채운 자"의 구조다. 양심을 지킨 사람만 기억하면 안 된다. 그 빈자리를 채운사람이 결국 불의한 체제를 완성시킨다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
2024년 12월 3일 윤석열(1960~)의 비상계엄 선포를 영국에서 생중계로 보며 나는 정명래를 떠올렸다. "정부의 위신은 뭐가 되오"라는 그 말이, 60년이 지나 다른 사람의 입에서 다시 나오지 않았는지를 우리는 경계해야 한다.
역사의 법정에는 공소시효가 없다. 그리고 그 법정의 방청석에는 우리가 앉아 있다.
참고문헌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원회, 2026, 『반헌법행위자열전 1-4』, 사회평론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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