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죄와 벌>에서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도끼로 60대의 전당포 노파를 살해한다. 이기적이고 타인에게 베풀줄 모르는 사회의 해악과 같은 존재고 그런 '벌레'는 죽어 마땅하다는 게 이유다. 그는 자신이 나폴레옹과 같은 영웅이라고 생각한다.
박수영의 시에도 비슷한 얘기가 있다. "왜 나는 조그만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王宮)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오십 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박상륭의 소설 <시인 일가네 겨울>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한국전쟁 상이용사인 주인공 홍선은 자신이 세상에서 하등 쓸모없는 존재라고 규정한 물래방아간의 늙고 병든 노인을 살해한다. 홍선이 주전자만한 노인을 돌로 내려친 날, 그는 이걸 '역사가 바뀌는 밤'이라고 믿고, 자신이 무엇인가 '창조'하고 있다고 믿는다.
이들의 공통점은 부조리의 '본질'에 다가가지 못한 채 누적된 사적 불만(분노)을 표출하고, 그것을 대의의 실천이라 스스로를 속여먹는다는 것이다.
슬라보예 지젝은 라캉의 '행위로의 이행(Passage à l'acte)'이라는 개념을 사회에 적용한다. 상징적 질서(법이나 제도)에 적용될 수 없는 불안이나 근원적인 결핍과 마주했을 때, 상징계(언어와 질서) 안에서 이를 소화하지 못하고 갑작스러운 행동으로 폭발하듯 터져 나오는 현상을 말한다. 보통 좌절감을 동반하며, 특정 대상이나 사소한 목적에 집착하는 행태로 나타난다.
자신이 처한 상황과 그 경험을 의미 있는 전체 속에 위치시킬 수 없는 상태. 언어나 법이라는 '상징계'의 테두리 안에서 갈등을 해결하지 못하고, 상징계 밖으로 뛰쳐나가 현실 세계에 폭력적 충격을 가하는 행동. 지금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의 상황이나 올림픽 공원 부정선거 시위대의 상황은 '행위로의 이행'으로 설명하기에 꽤 적합하다.
이들은 확고한 비전을 가지고 소통을 시도하는 게 아니고, 설명할 수 없는 모종의 분노를 상징계를 거치지 않고 직접적으로 사회에 배출함으로써 자신의 '실존'을 증명하려 몸부림을 친다.
올림픽 공원 부정선거 시위의 초기 분노는 6·3 지방선거 당시 발생한 '투표용지 부족 사태'로 인한 참정권 침해에서 비롯됐다. 합법적 절차로 시스템 안에서 해결될 수 있는 사항이지만, 불만에 가득찬 '부정선거', '윤어게인' 시위대는 핸드볼 경기장의 물리적 출입구를 봉쇄하는 것으로 대응하며 미성년 선수들에게까지 공격성을 보여준다.
'부정선거'라는 입증되지도, 해결될 수도 없는 구호는 지극히 추상적이다. 이들은 이 추상적 구호를 위해 성조기를 들고 시스템을 부정한다. 계엄 반대 시위나 탄핵 촉구 시위는 뚜렸한 목적이 있었고, 구호는 매우 선명했다. 목표하는 질서가 존재하고, 그것이 회복되는 순간 행위를 중단했다. 하지만 '올공 시위대'의 목적은 '시스템을 부정하자'는 것이어서 목표가 불분명하고, 실현될 가능성도 없다. '파괴 충동' 그 자체다.
장동혁 대표는 당내에서 쇄신 요구가 분출될 때마다 충동적 행위를 보여 왔다. 갑작스럽게 단식에 돌입한다던가, 갑작스럽게 단식을 풀어버린다던가. 선거를 앞두고 어느날 미국으로 훌쩍 떠나버리는 것도 그렇다. '올공 시위대'에 합류해 자당 소속 서울시장 당선인 보고 들으라는 듯 '재선거' 구호를 외치기도 한다. 그리고 잠잠해지면 병원에 입원해 소통 요구를 차단한다.
권력 투쟁 그 자체가 장 대표의 실존적 목표인 것처럼 보인다. 절박한 쇄신 요구를 당권 투쟁으로 오인하고, 이미 당 밖으로 쫓아낸 한동훈 의원을 적으로 설정한 후 집요하게 때려댄다. 마치 <죄와 벌>의 라스콜리니코프처럼 불안한 심성을 해갈하려 '전당포 노파'(한동훈)를 응징하고, <시인 일가네 겨울>의 주인공이 부조리의 본질을 꿰뚫지 못한 채 '늙고 병든 노인'을 향해 주전자만한 돌덩이를 치켜드는 것처럼.
그의 혁명은 혁명이 아니다. 아무도 장동혁 대표가 왜 화가 나 있고, 왜 단식을 하고, 왜 미국에 가고, 왜 올림픽 공원으로 향하는지 정확한 이유를 알지 못한다. 하나 확실한 것은 올공 시위대나 장동혁 대표 모두 지금 벌어지고 있는 사태의 근본적인 해결이나 어지러운 시스템이 정상화될 수 있도록 하는 노력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장동혁 대표나 올공 시위대 역시 우리 사회가 내포한 무의식의 발로일 것이다. 대한민국을 하나의 거대한 인격체로 비유하자면, 우리 안에는 이재명도 있고, 장동혁도 있고, 전한길도 있고, 김어준도 있는 것이다. <죄와 벌>이 쓰여진 시대는 1860년대 러시아에서 급격한 근대화가 이뤄진 혼란의 시기였고, <시인 일가네 겨울>이 쓰여진 시대 역시 한국전쟁의 폐허를 지나며 사회 전체가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을 앓던 시기였다.
어쩌면 우리는 전에 겪어 보지 못한 혼란의 시대를 통과하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지난 100여년 간 세계 체제를 이끌어 온 미국이 트럼프주의에 잠식되고 있는 것을 보라. 경제 성장기를 지나 자본주의의 정점 속에서 지난 수십년간 이어져 왔던 가치들은 한계 상황에 내몰리고 있다. 양극화는 더욱 심화되고, 초연결 사회의 부작용이 표출되며 극우가 부상하고 자유주의적 가치들이 조롱받고 있다. 사회 불안과 불만, 분노의 근원을 찾아 치유하는 방법 외엔 없다. 그것은 부동산 문제일 수도 있고, 청년들이 느끼는 '불공정'의 문제일 수도 있으며, 자본주의의 모순이나, 민주주의의 태생적 한계 같은 것일 수 있다. 특히 상대적 박탈감과 양극화는 집권 여당과 대통령이 특별히 신경써야 할 키워드다.
트럼프나 장동혁과 같은 약삭빠른 정치인들은 상징계 속에서 자리잡지 못한 분노의 원형에 올라 타 위태로운 곡예를 펼치고 있다. 자신이 지금 무엇을 하는지 조차 규정할 수 없는 상태로 분노의 대상을 찾아 이리저리 흘러 다니는 것이다. 우린 아직 그것들에게 이름을 붙여줄 수 없다. 정치라는 게 참으로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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